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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 (일)

결혼하지 않아도, 혈연이 아니어도 ‘함께 사는 가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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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19. 베를린의 ‘함께’ 사는 공동체, 가족

아이 키우며 사는 동성 파트너

결혼 원치 않는 동거 커플들

한부모 가족이 전체 가구의 19%

혈연 넘어 함께 사는 권리 인정

‘생활파트너십’ 가족의 가치 넓히고

입양권 보장 동성결혼으로 이어져


한겨레

퀴어 가족, 동성 생활파트너십 등 독일 베를린에는 다양한 가족들이 산다. 지난해 7월, 베를린의 마워공원 풍경. 채헤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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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드라마 <베를린의 개들>(Dogs of Berlin)은 충격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건 발생 이후 경찰 간부가 상황 보고를 위해 경찰청장 집으로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아들이 문을 열자 경찰 간부가 말한다. “너희 어머니를 만나러 왔어.”(경찰청장은 여자다) 그랬더니 아들이 되묻는다. “어떤 엄마요?” 그러자 간부가 답한다. “경찰청장인 엄마.” 경찰청장 가족은 레즈비언 부부로, 두명의 엄마가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드라마 속 한 장면이지만, 베를린에서는 실제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만날 수 있다.

일본계 독일인 샤를로트(41)와 그의 파트너 캐롤은 2013년 덴마크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샤를로트가 살고 있는 베를린, 로마, 파리, 캐롤의 여동생이 살고 있는 오슬로 등에서 만나며 그들은 연인으로 지냈다.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은 가족이 되기로 결심하고 아이를 갖기로 했다.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기증받는 레즈비언 커플도 많지만, 샤를로트와 캐롤은 한 게이 친구에게 정자를 기증받기로 했다. 이들은 게이 산부인과 의사에게 전문적인 조언을 받아 2014년 겨울, 임신에 성공했다.

이듬해 봄에는 베를린에서 ‘생활파트너십’(Lebenspartnerschaft) 등록을 마쳤고, 이후 부부가 갖는 법적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독일 ‘생활파트너십’은 2017년 7월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기 전까지 동성 파트너의 법적 권리를 위해 시행된 제도다. 이 제도를 통해 동성 파트너는 일반 부부가 가지는 법적 권리를 누릴 수 있었지만, 아이 입양권만 가질 수 없었다. 동성결혼 합법화 이후 독일은 새로운 파트너십 신청을 받지 않고 있으며, 기존 파트너십 등록자는 결혼 관계로 전환하거나 계속 파트너십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샤를로트와 캐롤은 결혼 관계로 전환하지 않아도 이미 법적 권리를 모두 누리고 있기 때문에 기존 파트너십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정자 기부한 게이도 함께 육아

샤를로트는 아들이 태어나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고 말했다. 특히 아들이 태어난 첫해에는 파트너와 아기를 계속 돌봐야 했기에 모든 일정을 아이에게 맞췄다. 다행히도 당시 샤를로트가 박사과정 장학금을 받고 있어 재정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캐롤은 큰 식당에서 셰프 보조 일을 하며 아이를 돌봤다.

아들이 14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보육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샤를로트와 캐롤은 프리랜서로 일하며 아이를 양육하고 있다. 평소 캐롤은 아침 7시30분에 출근하고, 샤를로트는 8시30분 아이를 보육원에 데려다주고 비영리단체로 출근한다. 샤를로트는 주 3일만 정기적으로 출근하고, 나머지 시간엔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면서 번역가, 예술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어 일정 조정이 가능하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은 정자를 기부한 게이 친구와 그의 파트너가 함께 아들을 돌본다. 샤를로트와 캐롤은 “정자를 기부한 게이 친구는 아이의 또 다른 보호자로서 육아에 늘 함께해주고 있으며, 아들은 그의 파트너를 삼촌이라 부르며 정기적으로 같이 시간을 보낸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샤를로트와 캐롤 모두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 수입은 이전에 비해 줄었지만 아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매일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해 먹고, 책을 함께 읽고, 여러 가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샤를로트는 “우리는 매우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며 “만약 누군가 우리를 보고 차별을 느낀다면, 이성애 중심 문화와 이를 강화시키는 동화책 같은 교육 제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샤를로트는 독일의 여러 교육 교재나 책에서 성소수자인 퀴어(Queer) 가족과 유색인종이 너무 적게 다뤄지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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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한부모 가족 비율은 크게 늘어 전체 가구의 19%다.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하인공원에서 한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는 모습. 채혜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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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원하지 않아 파트너 관계만 유지하며 사는 친구도 있다. 오스트리아 국적인 파울라(49)는 현재 동성 파트너 레나타와 함께 지낸다. 파울라에게는 갓 스무살이 된 아들 요하네스가 있다. 1999년, 베를린의 한 예술 컬렉티브에서 만난 파트너 알렉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다. 남성과 결혼을 원치 않았던 파울라는 아들 요하네스가 5살이 됐을 때 알렉스와 헤어졌고, 요하네스는 파울라와 알렉스 집을 오가며 자랐다.

파울라와 알렉스는 모두 예술가라 양육비 마련이 쉽지 않았지만, 정부에서 지급되는 ‘아동수당’과 ‘실업수당’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독일은 부모 수입에 상관없이 독일에 사는 모든 아동에게 ‘아동수당’(Kindergeld)을 지급한다. 현재 첫째와 둘째 아이는 월 204유로(약 26만9천원), 셋째 아이 월 210유로(약 27만7천원), 넷째 아이부터는 월 235유로(약 31만4천원)를 받는다. 파울라는 “헤어진 파트너와 아이를 함께 키우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나 늘 많은 친구가 도움을 줬고, 무엇보다 월세가 싼 집을 구한 것이 가장 큰 힘이 됐다”며 “이제 요하네스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거나 우리 집 또는 알렉스 집에서 지낸다”고 말했다.

독일 연방정부의 ‘가족보고서 2017’(3년 단위로 발행)을 보면, 샤를로트나 파울라와 같은 가족 형태가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에서 미성년 자녀를 키우는 파트너십 가구는 93만가구가 넘어가면서 지난 10년간 38%나 증가했다. 반면 지난 10년간 미성년 자녀와 결혼한 부부로 이뤄진 전통적 핵가족 가구 수는 10% 줄었다.

이와 함께 한부모 가족도 크게 늘어, 전체 가구의 19%를 차지한 것도 특징이다. 베를린에서 만난 스페인 친구 카르멘(66)은 싱글맘이다. 2년 전 은퇴한 그는 1980년대에 중남미에 있는 니카라과로 떠나 13년간 살았다. 니카라과에서 지낸 지 3년쯤 지났을 때 연인을 만났고 그와 딸 엘라를 출산했다.

셰어하우스, 공동체 가족

엘라를 낳았지만 당시 연인과는 친구로 남았고, 카르멘은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혼자 아이를 키웠다. 엘라를 키우면서도 몇번 연애는 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은퇴한 지금도 새로운 걸 배우고 경험하기 위해 세계를 여행하는 카르멘을 보면, “결혼은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 그의 말이 절로 이해가 간다. 그는 “딸 엘라를 키운 것은 내 인생의 큰 축복이자 행복이고, 단지 한가지 아쉬운 점은 아이를 한명 더 낳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이 밖에도 베를린의 여러 친구와 동료들은 공동체 가족으로 산다. 셰어하우스에서 함께 살며 힘든 일이 있을 때 혈연가족보다 가까이 서로를 돕고, 동성 파트너와 살며 이웃 한부모 가족의 아이를 돌봐주기도 한다. 남편과 사는 집의 게스트룸을 숙소가 급히 필요한 난민을 위해 늘 비워두는 친구도 있다.

이들을 보며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새긴다. 결혼 여부나 성별, 나이 등에 상관없이 이들은 그저 삶의 동반자로 ‘함께’ 산다. 그리고 이들의 삶은 ‘함께 사는 것’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생활파트너십과 같은 제도가 뒷받침해주고 있다.

독일 정부의 이동 제한 조처로 모두가 격리된 채 집에서 지낸 지 3주째. 병원과 약국, 음식과 생필품을 살 수 있는 가게 등을 제외하곤 모든 가게의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하루에도 몇번씩 안부를 묻는 동료와 친구들의 연락이 도착한다. 아시아인인 내가 음식을 사러 나가는 길에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진 않은지, 혼자 지내는 게 괜찮은지 따뜻하게 물어봐준다. 독일에서는 이들이 나의 자매이자 가족이다. 혈연보다 더 단단한, 사랑하는 나의 독일 가족. 위기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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