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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코로나는 정신병, 보드카 마셔라" 벨라루스 독재자 왜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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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코로나 무시하는 루카셴코 대통령

국경 개방, 정상 영업, 스포츠경기 개최

'소련식 경제'로 26년 간 통치해 온 독재자

올해 8월 대선 앞두고 경제 타격 두려워 해

조선일보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지난 4일 아마추어 아이스하키 경기에 직접 참가해 경기하고 있는 모습. 벨라루스에선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도 불구하고 스포츠 경기가 정상적으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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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 각국이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코로나 방역 수준을 높이고 있는 가운데 ‘나홀로’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나라가 있다. 옛 소련 국가인 벨라루스다. 아직도 벨라루스에선 대중교통이 다니고 대부분 식당과 상점이 정상 영업하며, 국경도 개방돼 있다. 대규모 관중이 몰리는 스포츠 경기도 개최된다. 이 나라 수장(首長)의 독특한 인식 때문이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66) 벨라루스 대통령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광란이자 정신병”이라며 각국의 코로나 방역 대책이 근거 없는 ‘오버 액션’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루카셴코 대통령의 코로나 관련 황당 발언들이 외신에 자주 노출됐다. 그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보드카를 마시고 사우나를 하면서 퇴치할 수 있다”거나 “(농장에서) 트랙터 일을 하다보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치유된다”는 등 근거 없어 보이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모두 공식석상에서 농담처럼 한 말들이다. 소련 시절 집단 농장 감독관 출신인 그는 지난 3일에는 농부들과의 면담 자리에서 “갓 태어난 염소 새끼들을 바라보는 것이 (코로나에 대한) 특효약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그의 ‘코로나 철학’에 따라 벨라루스의 코로나 방역 대책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수도 민스크를 비롯한 국토 전역에서 각종 공장과 회사 등이 정상 영업하고 있고 식당이나 상점도 문을 연다. 마스크를 쓴 행인을 보기가 어렵다. 국경도 열려 있다. 특히 벨라루스는 전 유럽에서 유일하게 프로 축구·아이스하키 경기를 정상 개최하고 있다. 대규모 관중이 몰리면 집단 감염 위험이 높은데도, 매 경기마다 1000명이 넘는 관중이 몰려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벨라루스 공식 통계에 따르면, 9일(현지 시각) 현재 코로나 확진자는 1486명, 사망자는 16명이다. 일각에선 공식 통계가 과소 측정됐다는 의견도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루카셴코의 이 같은 행보는 코로나 사태가 벨라루스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외출 금지령 등 통제책을 내리면 경제 가동이 중단되는 만큼, 코로나 사태를 아무 것도 아닌 ‘소동’ 쯤으로 무시하고 넘어가려 한다는 것이다.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벨라루스 전문가인 리호르 아스타페니아는 “록다운(이동금지 정책)은 벨라루스에 불황을 가져올 것”이라며 “서방 국가와 달리 벨라루스는 (록다운으로 피해를 볼) 회사나 개인들에게 보상을 해 줄 만한 충분한 자원이 없다”고 했다. 오는 8월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그가 경제 지표에 특히 예민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렇지만 전세계가 코로나 위험에 떨고 있는데, 그는 어떻게 이런 ‘천하태평’ 언행을 계속할 수 있는 걸까. 이는 무려 26년 간 집권하고 있는 그의 독재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지난 1994년 벨라루스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계속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다. 5선 째다. 철권 통치로 알려진 이웃 나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20년·4선)보다도 길다.

그는 1994년 집권 후 소련식 통제 경제 체제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같은 옛 소련 국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급격한 자본주의 개혁 정책으로 사회 혼란을 겪은 것과 대조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경제를 유지했다. 러시아에선 소련 시절 때의 국유 회사·자산이 무더기로 사유화 되면서 ‘올리가르히’로 불리는 부패한 재벌 세력들이 등장했지만, 루카셴코 대통령은 사유화를 원천 봉쇄했다. 수도 민스크에는 레닌 동상과 스탈린 시절의 화려한 건물들이 보존됐다. 국민들은 ‘위대한 소련’의 추억에 잠기게 해주는 그를 지지했다. 1994년 대선(예선 투표)에서 그의 득표율은 45%였는데, 2001년 대선에선 77%로 뛰고 그 뒤 대선에서도 80% 내외를 유지했다.

그는 높은 지지율 유지를 위해 포퓰리즘 복지 정책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2010년 대선을 앞두고서 공무원들의 봉급을 일제히 40%씩 올려주는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라 곳간은 바닥나지 않았다. 전통적인 우방인 러시아가 싼 값에 원유를 공급하고, 벨라루스는 이 원유를 정제해 서방에 내다 파는 중개 무역으로 큰 수익을 올렸기 때문이다.

벨라루스 정부는 돈으로 민심을 사는 한편, 야당과 시민단체의 집회를 강경 진압하고 독립적인 사회 연구 기관을 탄압했다. 현재 벨라루스에는 루카셴코 대통령의 지지율을 조사하는 독립적인 여론조사 기관이 하나도 없다. 오로지 지난 대선 득표율로만 그의 지지율을 가늠할 수 있는데, 그 득표율도 조작 논란이 있다. 권위주의 러시아에서도 여론 조사 기관은 있는 것과 비교하면, 푸틴 대통령보다 더 심한 철권 통치인 셈이다. 국영 언론은 그에게 불리한 사실은 거의 보도하지 않는다.

최근엔 그의 세습 통치 가능성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가 공식석상에 그의 어린 아들인 니콜라이 루카셴코(16)를 대동하는 일이 잦아서다. 아들 니콜라이는 군사 퍼레이드나 외국 국빈 방문 때 아버지의 옆에 등장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1세 땐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카셴코 대통령은 2016년 언론 인터뷰에서 세습 통치 가능성을 공식 부인했다. 그는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면) 내가 20년간 더 통치한다는 것인가”라며 “말도 안된다”고 했다. 현재 벨라루스에선 35세 이상에게만 대통령 피선거권이 인정된다.

[권순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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