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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모두의 나라를 지키고 싶은 변희수 하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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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⑥너무 늦은 편지―변희수 하사에게

강제전역 당한 변희수 하사에게

성별정정 수술 하며 50년 살아온

김비가 보내는 늦은 편지

사회 지키기 위해 제 역할 하려는

한 사람의 뜨거운 마음 보았네

상처받은 사람끼리 상처주는 세상

끝끝내 ‘환대의 마음’ 기억하길


한겨레

변희수 하사는 성별정정 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육군에서 강제전역을 당했다. 3월11일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군인권센터에서 만난 변 하사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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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수 하사님,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당신의 일상은 오늘도 안전한가요?

어쩌면 다른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저는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을 ‘하사님’으로 부르려고 합니다. 당신의 지금 직위가 무엇이든, 당신의 성별이 무엇이든, 한 인간으로서 공동체를 지키는 일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그 마음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 나라 군인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한 셈이니까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앞에 당신이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떨리는 손끝을 눈썹 위에 붙이고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 싶다고 선언했을 때, 나는 그때 고통을 감내하면서 평생 군인으로 살고자 했던 아버지가 생각났어요. 하필 내 아버지도 한국전쟁으로 손 하나와 눈 하나를 잃었는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육체는 도구일 뿐이라며 군인으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가로막을 수는 없는 듯 보였거든요. 사람들은 어이없게도 당신의 성별을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사회를 지키기 위해 제 역할을 이어가고자 하는 한 사람의 뜨거운 마음을 보았네요. 그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 남자나 여자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마음 뭉클했네요.

이긴 자여서 앞에 선 사람

지난겨울, 당신의 강제전역과 트랜스젠더 숙명여대 입학 문제 등 우리에 관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후, 여러 곳에서 응답을 해달라는 청을 해왔지만 무어라 말을 보태지 못했어요. 수술 이전에 이미 싸움은 지긋지긋하게 했으니 그 후에는 조금 평화롭게 살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네요. 날 선 말들이 아니라, 포용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는 것 같아 참 안타까워요.

나의 말 너머에 사람이 있구나, 벼랑에서 간신히 기어오른 사람을 내가 다시 절벽 너머로 밀치는 발길질을 하고 있구나,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는 자신을 오히려 당당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너무 자주 목격하게 되네요.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모든 걸 내던지고 싸워야 하는 광경을 왜 우린 그토록 자주 마주해야 하나, 참혹한 마음이 들어요. 삶을 뿌리째 흔드는 막말에 비명이 치밀어 오르다가, 우리처럼 상처를 입은 그들을 모르지 않기에 말문이 막히고 말아요.

그래도 당신이 나처럼 유약하지 않고 강한 사람이라 다행스러워 보여요. 당신이 군복을 입고 울먹이는 모습을 차마 끝까지 보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마침내 얼굴을 드러내고, 카메라 앞에 섰을 그 마음이, 그 각오가 어떤 건지, 나는 알아요. 싸우기 위해 앞에 선 것이 아니라, 싸우고 이긴 자여서 앞에 선 것이란 사실을. 혐오로 치닫는 이 사회를 지켜내기 위해 곁에 선 소중한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으며 앞으로 나선 것임을.

그래도 나는 그 울먹임을 끝까지 보지는 못하겠더라고요.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볼 수 없어서, 말간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어서 외면하고 말았네요. 혹시 당신 역시 이 편지를 끝까지 읽지 못하더라도 괜찮아요.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 역시 나를 알 리 없겠지만,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우리 살아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요. 이 어리석은 세상은 영원히 ‘그래서 당신은 여성입니까, 남성입니까?’ 부끄러운 줄 모르는 질문을 묻고 또 묻겠지만, 나는 당신이 멋진 사람이라는 걸 알겠으니까요. 당신을 모르는 나에게는, 그거면 충분하니까요.

한겨레

남편인 박조건형 작가가 그린 김비씨. 일상드로잉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에 실렸다. 박조건형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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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이를 먹은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무어라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이 사회가 나로부터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무언지 알 것 같은데, 스스로를 속이는 삶을 살지 못하는 천성인 나에게 그것 역시 나 자신을 속이는 또 다른 비굴함이 되고 마네요. 성별을 떠나서,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중년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래도 한 가지 말해줄 수 있는 건, ‘환대하는 마음’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에게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받기 쉽지 않았던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환대할 수 있는 존재로 세상에 나아갈 때 우리는 이전의 삶과는 분명 달라진 세계 속에 서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무표정일 때 타인의 시선은 더욱 따가워지지만, 먼저 웃으며 인사하면 억지로라도 마주 웃어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이란 존재가 아닐까 싶거든요. 먼저 환대의 손길을 내미는 누군가를 외면할 수 있는 사람까지 지금 당장 신경 쓰며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 일들로 밀쳐졌다고 느끼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곁에, 당신의 뒤에 서 있어요. 깊은 고독에 침잠하는 일 따위 생각 많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당신은 마침내 승리해낸 내 몸과의 싸움에 기뻐하며, 육체를 뛰어넘어 당당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 스스로에게, 격려하고 칭찬하며 나머지 생을 비로소 마음껏 즐길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들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이 삶을, 받아들이고,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마음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바로 당신이 목격자가 되어 그 마음들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생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환대가 또 다른 환대를 불러오고, 환대하는 삶이 이겨낸 것들을 추억처럼 낱장으로 넘기면서, 미래 어느 날 모두 서로 다른 이름으로 충분히 존중받으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줄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사랑받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간절한지 아마 당신 역시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연애의 감정으로 사랑받는 일 말고요. 사람으로 사랑받는 것, 같은 성별로 사랑받는 것, 친구에게, 가족에게 사랑받는 것. 추억으로 사랑받는 것, 어린 시절로 사랑받는 것, 하나의 존재로서 사랑받는 것. 삶 곳곳에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사랑 중에 ‘트랜스젠더’라는 이물스러운 이름의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은 참으로 아득하고 희미하지만, 우리는 생의 중간에 그 모든 사랑을 처음부터 다시 되찾아야 하는 만큼, 어떤 사랑은 끝내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만큼, 이 세상에 사랑의 함성이 울려 퍼지게 하는 삶을 살도록 해요.

‘고맙다’는 말보다 더 고마워요

어제오늘 연달아 비가 왔는데, 비가 내리고 따스한 계절이 되면 다들 괜찮아질 거라고 하는데, 정말 우리의 일상도 괜찮아지겠죠? 너무 걱정하지 않도록 해요.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소중한 서로의 존재는 더욱 선명해졌으니, 어리석었던 경계를 넘어 우리 서로를 지키는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으리라 믿어요.

나의 꿈은 ‘행복한 자연사’라고 말하곤 하는데, 당신의 꿈은 어떤가요? 나는 이렇게 사는 삶의 지극히 평범한 보통 인생을 반드시 이 사회의 기록에 남겨놓고 싶거든요. 익숙한 모습의 아줌마로, 할머니로,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이웃으로의 삶을 남기고 싶어요. ‘아이고 즐겁게 잘 살았다!’ 넉넉하게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는 그런 생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우린 모두 갇힌 몸인지도 모르겠어요. 육체의 몸, 성별의 몸, 사회의 몸, 그 몸이 서로를 지키는 몸이 되도록 우린 끊임없이 변화하고 역동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바로 당신이 그 아름다운 생의 꿈틀거림을 보여주었네요, 너무도 당당하게 말이지요.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보다 더 고마움을 담은 말이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의 존재처럼 아직 이 세상엔 그 말 한마디가 없으니, 그저 고맙고 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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