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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물잔으로 건배하면 안 될까 [명욱의 술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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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로 유명한 크리스 에반스 주연의 영화 ‘아이스맨’(2012)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I thought it’s bad luck to cheers with water.” 물을 가지고 건배하는 것은 악운을 가지고 온다는 말이다. 한국의 술자리에서도 물잔으로 건배하면 한소리 들을 때가 있다. 주스라도 넣어서 건배하라고 말이다.

왜 물잔으로 건배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일까? 동서양 모두에서 물은 죽음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이 물이며, 그것을 건너는 순간 세계가 바뀐다. 또 물은 죽음과 동시에 재생을 의미하므로 물을 건넌다는 것은 이승의 존재가 저승의 존재로 새로이 탄생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불국사 등 유명 사찰의 입구에도 늘 개울과 다리가 함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이며, 침례교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도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문화가 그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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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마셔야만 저승으로 가는 문화도 있다. 바로 ‘오탁수’(五濁水)라는 물이다.

‘오탁’이란 불교의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서 ‘오’란 명·겁·중생·견·번뇌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탁’(濁)은 오염, 부패, 타락을 의미한다. 즉 ‘오탁악세’란 다섯 가지가 오염돼 타락한 나쁜 세계, 혹은 말세를 말한다. 즉 저승으로 가는 오탁수는 이 다섯 가지를 끊고 저승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의 경전인 ‘장아함경’(長阿含經)에도 물과 죽음의 관계가 나타난다. 석가모니가 임종 직전에 제자에게 물을 요청했고, 이후 귀신이 그 물을 석가모니에게 줬다는 것이다. 우리 설화에서 저승의 여정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자료는 ‘바리공주’와 ‘차사본풀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 ‘신과 함께’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의 장례식에서는 ‘마쓰고노미즈’(末期の水)라고 하여 고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는 관습이 있다. 고인이 사후에 목이 말라 고생하지 않도록 한 배려다. 또 잔에 물을 담아 건배를 하는데, 상대방을 저승으로 보낸다는 의미, 생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며 물로 나누는 것이다.

물로 죽음을 나누는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인은 지하에 흐르는 망각의 강 ‘레테’의 물을 마시고 과거를 잊는다고 믿었다. 불교에서의 오탁수와 비슷한 이치다. 고인을 보낼 때 물잔으로 건배를 하며, 고인이 다른 세상으로 무사히 가기를 빌었다. 또 물속에 미래의 무덤이 보인다는 신앙도 있어 건배 제의자의 죽음을 상징하는 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결국 동양이나 서양, 모두 물을 든 잔은 이별과 죽음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현대에도 물잔으로 건배하면 안 되는 것일까? 개인적인 견해로는 물잔으로 건배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옛것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다만 물잔이라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살짝 알려줄 필요는 있다. 술인 줄 알았는데 물인 것을 알게 되면 애주가 입장에서는 배신감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교수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숙명여대 미식문화최고위 과정,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객원교수. SBS팟캐스트 ‘말술남녀’, KBS 1라디오 ‘김성완의 시사夜’의 ‘불금의 교양학’에 출연 중.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 ‘말술남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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