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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한국적 아노미 그린 ‘기생충’에 ‘반항형 인간’은 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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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표창원의 여의도 프로파일링

⑥ 영화 ‘기생충’과 범죄정치학

‘기생충’이 보여준 한국적 아노미

일상 감내하는 ‘의례형 인간’ 김씨

불법으로 돈 좇는 ‘혁신형’ 되려다

실패해 결국 ‘은둔형 인간’ 된 이야기

정치 핵심은 ‘의례형 인간 지키기’

지배 엘리트 탐욕으로 윤리 무너져

성실한 다수의 ‘의례형 인간’들을

‘은둔형’ ‘혁신형’으로 내모는 사회

21대 국회는 과연 바꿀 수 있을까


한겨레

영화 <기생충>은 로버트 머튼이 제시한 사회적 아노미와 이에 적응하는 다양한 유형의 인간 군상을 생생하고 흥미롭게 보여준다. 하루하루 일상을 근근이 살아가던 ‘김씨 가족’은 신분을 위조해 돈을 버는 ‘혁신형 인간’이 되려다 좌초해 ‘은둔형 인간’으로 전락한다.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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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미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성공의 잣대가 돈과 권력으로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극히 일부만 성공하고 대다수 시민은 성공하지 못한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정치인들이나 학교, 대중매체에서는 다양한 ‘성공신화’를 보여주며 ‘당신도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 코리안드림을 부추긴다. 머튼에 따르면, 이렇게 모순된 사회는 ‘목표와 수단의 불일치’로 가치관이 붕괴되고, 규범이 사라져 사회적 혼란이 초래된다. 사회적·개인적 불안정 상태인 ‘아노미’에 빠지는 것이다.

시민들은 이런 아노미 상황에서 살아가기 위해 대개 5가지 유형의 적응 행태를 보인다. 첫번째 유형은 부자나 권력자가 되기 위해, 사회에서 제시하고 요구하는 가치와 방식과 수단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추구하는 ‘동조형 인간’. 두번째 유형은 돈과 권력을 목표로 삼되, 이를 위해 불법·탈법·일탈·부도덕 등 권장되지 않거나 금지된 비정상적인 수단과 방법에 의존하는 ‘혁신형 인간’. 세번째 유형은 성공이란 것은 매우 소수의 금수저나 천재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라는 현실을 깨닫고 거창한 꿈과 목표를 포기한 채 생존과 가족 부양을 위해 힘든 일상을 성실히 살아나가는 ‘의례형 인간’. 네번째 유형은 성공에 대한 목표나 기대는 물론, 힘들고 지겨운 노동과 일상생활마저 포기하고 세상을 등진 채 낙오자로 살아가는 ‘은둔형 인간’. 마지막으로 성공을 위해 경쟁하고 노력하라는 사회의 기대와 요구를 거부하고, 모순되고 불합리한 세상에 저항하거나 불의한 사회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저항하는 ‘반항형 인간’이다.

물론, 이 다섯 유형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이다. 경쟁에서 밀리거나 실수하거나 더 힘센 권력자의 눈 밖에 난 동조형 인간이 꿈을 포기한 의례형 인간이 되거나, 좌절감에 마약이나 알코올중독에 빠져 은둔형 인간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때론 경쟁자를 청부 살해하거나 회삿돈을 횡령하는 등의 불법적 수단에 의존해 혁신형 인간으로 타락하기도 하며, 일부는 혁명에 투신하는 반항형 인간이 되기도 한다.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한국적 아노미

머튼이 제시한 아노미 문제의 해결책은 가치와 성공 기준의 다양화다. 그 변화는 힘들고 오랜 여정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 국가경영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사회에서 가장 다수를 차지하며 생산이나 소비, 여론과 투표 등 정치의 중추와 주력에 해당하는 의례형 인간들의 이탈을 막는 일이다. 국가와 사회체제의 지속과 안정을 바란다면, 주류 정치집단과 국가경영 엘리트들은 교육과 문화, 복지와 촘촘하게 설계된 보상 체계를 통해 끊임없이 의례형 인간의 삶을 살피고 지지하고 보호하는 데 전념해야 할 것이다.

영화 <기생충>은 머튼이 제시한 사회적 아노미와 이에 적응하는 다양한 유형의 인간 군상을 생생하고 흥미롭게 보여준다. 유명 건축가가 지은 호화 주택은 아노미적 한국 사회의 ‘성공’을 상징한다. 이 집의 주인, 정보기술기업 대표인 박 사장 가족은 성공한 동조형 인간의 표본이다. 큰 욕심 없이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며 살아가던 ‘김씨 가족’과 박 사장 집 운전기사 ‘윤 기사’와 가사도우미 ‘문광’은 평범한 의례형 인간들이다. 사업 실패로 큰 빚을 지고 채권자들을 피해 박 사장 집 지하에 숨어 사는 ‘근세’는 은둔형 인간. 하지만 평범했던 김씨 가족은 박 사장 자녀의 과외 자리가 제공하는 돈을 위해 자격과 신분 위조라는 범죄를 저지르며 혁신형 인간으로 변신한다.

박 사장 일가가 보여주는 ‘한국형 동조형 인간’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공감능력 부족’이다. 모든 걸 다 가지고 부족할 것 없이 누리며 살아가는 자신들만의 협소한 시각과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이해한다. 김씨 가족에게서 나는 ‘냄새’를 지하철을 타는 대다수 의례형 인간의 냄새로 연결해 서민 전체를 무시하고 경멸한다. 생존과 가족 부양의 수단인 돈을 위해 힘들고 구차한 일상을 견디던 기택(김씨 가족 중 아버지)은 결국 고조된 갈등과 긴장 상황에서 분노를 폭발시킨 뒤 도피해 숨어 지내는 은둔형 인간이 된다. 대왕 카스테라 사업이 상징하는 코리안드림의 희생자라는 공통점을 기택과 근세는 지닌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다가 국가 경제 상황 악화로 구조조정을 당하고 밖으로 내몰린 뒤, 손쉽게 ‘대박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언론과 광고에 속아 모든 것을 다 날린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들의 몰락에는 ‘의례형 인간 지키기’를 소홀히 한 주류 정치집단과 국가경영 엘리트들 책임이 크다. 물론 이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무능한 정치권력과 무책임한 경제적 지배세력이 국가부도 위기,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한 뒤 대한민국에는 사회적 아노미가 찾아왔다.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졌고, 성실한 노동에는 정직한 보상이 따른다는 사회적 신뢰도 깨졌다. 성실하게 제 역할을 해오던 직장인, 노동자들이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희생해 기업의 구조조정에 도움을 주고, 서민들이 장농 속 금붙이를 꺼내놓으며 국가 경제를 살려 놨더니, 위기를 벗어난 부자와 엘리트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공공개발 계획 정보 등을 이용해 땅 짚고 헤엄치기식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번 이들이 높은 임대료를 받으며 호의호식하고 부를 과시한다.

한겨레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 이튿날인 2017년 3월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경복궁 담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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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교체 성공했어도 경제개혁은 요원

각자도생하라는 정글의 법칙이 상식이 된 세상에서 사기꾼 조희팔, 주수도 등이 주도한 다단계 금융 사기가 판쳤다. 이들은 부패 정치인, 비리 공무원과 유착하고 유명인과 연예인 등을 끌어들여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고 인생을 무너트렸다. 직장을 잃거나 사업 실패 혹은 사고 피해를 본 뒤 국가와 정부, 공적 시스템을 믿지 못하고 사회 혼란에 불안을 느낀 수많은 이들이 도박이나 알코올·약물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사이비 종교에 돈과 삶과 영혼을 강탈당하고, 가족과 등을 돌린 채 피폐한 은둔형 인간으로 내몰리고 있다. 삶을 포기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자살자도 늘었다. 겉으론 품위와 교양을 내세우고 속으론 쾌락과 사치 욕구로 가득 찬 <기생충> 속 박 사장 일가의 위선과 갑질은, 현실 사회에선 더욱 심각하고 노골적이다. 일부 재벌과 그 자녀들은 서민에 대한 막말, 가사도우미 등을 향한 폭력과 폭언, 마약 운반과 복용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상류층 체면치레’마저 걷어찬 밑바닥 모습을 보였다.

돈과 권력이라는 희소하고 획일화된 가치만을 성공 기준으로 삼는 아노미적 사회. 이 불합리하고 불의하고 불공정한 체제와 구조를 깨부수거나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반항형 인간’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는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어쩌면 그 역할과 기능을 관객에게 맡겼는지도 모른다.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 <설국열차>는 혁명적 반란을 일으키는 인물인 커티스와 꼬리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설국열차의 반란이 결국 국가체제를 상징하는 열차 자체의 파괴와 대량 살상으로 이어졌듯, 현실 속 수많은 혁명은 많은 피와 희생, 반동과 새로운 지배 계층 및 체제의 등장이라는 허무한 결과로 이어졌다. 반면에 소수의 반항형 인간들이 추동하고 다수의 의례형 인간, 은둔형 인간들이 동참해서 일으킨 선거 혁명, 정권 교체 등 정치적 변혁은 자유와 평등, 인권을 향상해 아노미 현상을 치유하고 사회의 통합성과 지속가능성, 안정성을 회복시켜왔다.

현 체제의 지배세력인 보수 정치집단과 권력 엘리트들이 전문성을 갖추고 합리적 행정과 경영을 통해, 사회의 중추인 의례형 인간들이 현실에 만족하고 일상의 행복을 느끼는 준법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면 아노미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한다면 아노미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설사 아노미 상황이 초래된다 하더라도 이를 치유하고 사회통합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과연 대한민국 정치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이명박 한나라당, 박근혜 새누리당 두 보수 정권은 부패와 무능, 국정농단으로 아노미를 초래했다. 4·19와 5·18 그리고 6월항쟁이 그랬듯 소수의 ‘반항형 정치사회 엘리트’들과 다수의 ‘의례형’ 및 ‘은둔형’ 시민들이 ‘촛불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교체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진보정치 집단과 정치인들이 사회경제 체제와 구조를 개혁해 아노미를 치유하고 사회통합성을 되찾아야 할 순서다. 그러나 정치개혁의 첫걸음인 개헌 시도는 좌절되었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왜곡된 상태다. ‘동물 국회’라는 난리를 겪으며 통과시킨 공수처법과 사법개혁 법안은 아직 실체로 구현되지 않았다. 노동자·농민·소상공인 등 전통적인 ‘을’들에게 주도권과 힘을 부여하는 소득주도 성장, 첨단 신산업 육성을 통해 산업구조를 변혁하는 혁신 성장,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도모하는 공정 경제 등이 대표하는 경제개혁 역시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토론과 논쟁, 협상과 타협을 하는 정치를 통해 법을 만들어가야 할 국회가 제 역할을 못 하기 때문이다.

국회부터 스스로의 아노미 깨달아야

진보 여당은 ‘반항형 엘리트’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불공정한 기득권적 행태와 제 식구 감싸기를 과감하게 반성하고 스스로를 혁신해야 한다. 무너진 보수 야당의 퇴행적 행태로 얻는 반사이익에 안주하지 말고, 체제와 구조 개혁에 매진해 성취해내야 한다. 개혁의 결실을 다수 국민이 직접 향유할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야 한다. 보수 야당은 과거 반성과 가치의 재정립으로부터 시작해 국가경영 능력,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품격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집권할 준비가 된 수권 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다. 재집권 가능성이 보여야 역지사지의 여유가 생겨 무조건 반대, 발목 잡기, 막말과 기행을 멈추게 된다. 국회와 정치부터 스스로의 아노미 상황을 깨닫고 혁신해야 <기생충> 속 인물들이 상징하는 국민의 아픔과 고통, 어려움을 치유하고 일상의 행복을 찾아줄 수 있을 것이다. 제21대 국회에 대한 기대가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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