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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美 코로나19 최전선 의료진·소방관의 새로운 시련 ‘양육권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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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뉴저지의 내과의사 버서 마요킨은 이혼한 전남편에게 근황을 알렸다.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2주간 화상 진료를 하다가 대면 진료를 재개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3일(현지시간) 마요킨이 11살, 8살 딸들과 주말을 함께 보내려고 전남편 집에 갔을 때, 전남편은 법원 결정문을 내밀었다. 서류에는 전남편이 한시적으로 두 딸에 대한 독점적 양육권을 갖게 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남편의 변호사가 ‘마요킨이 아이들을 코로나19에 감염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사를 설득해 얻어낸 것이었다.

둘째 딸의 생일을 축하하며 주말을 지내려던 마요킨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그는 대신 법원이 결정을 번복하도록 서류를 만드느라 주말 내내 씨름해야 했다. 마요킨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누군가의 부모”라며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최전선에 있었다는 이유로 아이들한테서 떨어져야 하는 거냐”고 하소연했다.

#2. 소방관 스티븐 틸모니의 처지도 마요킨과 비슷하다.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사는 그의 전처는 미국 내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하자 21개월 된 아들이 틸모니와 잠시라도 같이 있는 게 불안했다. 틸모니가 자신과 약혼녀(병원 간호사)는 근무 중 항상 개인보호장구를 착용하는 등 적절한 안전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처는 변호사 조언을 받아 주정부의 자택 대피령 기간 동안 자신의 독점적 양육권을 요구하는 서류를 제출했다. 전처의 변호사는 “(감염 위험성 때문에) 가족과 멀리 떨어지기 위해 일부러 차에서 잠을 자는 응급요원들도 많다”며 “아이가 (코로나19) 노출 가능성이 가장 낮은 부모와 함께 지내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틸모니 측은 “아빠가 단지 소방관이라는 이유로, 법원에서 허락한 양육 시간을 아이 엄마에 의해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세계일보

지난 5일(현지시간) 뉴욕 브루클린 버러파크 인근 마이모니데스 메디컬센터의 의료진들이 코로나19환자를 이송하고 있다. 뉴욕=AFP연합뉴스


코로나19 대응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의사와 간호사, 소방관들 가운데 감염 위험성 때문에 이혼한 배우자로부터 공동 양육권 또는 자녀 방문 권리를 거부당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전했다.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결정적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에게 벌을 주는 셈이라는 주장과 그들의 직업 자체가 가족 구성원에게 큰 위험을 줄 수 있다는 반론이 첨예하게 맞부딪히며 논란이 일고 있다.

이같은 가족 내 안전 우려를 해소해줄 만한 똑부러진 가이드라인도 제시된 것이 없다.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가도 되는지, 혹은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도 되는지, 각자의 집에 누가 드나들어도 되는지 등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

지침이 있더라도 지역마다 천차만별이다. 테네시주 데이비드슨카운티 지방법원은 자택대피령이 선포된지 4시간 만에 “함께 살고 있는 부모가 아이를 양육하고, 대피령 해제 시까지 단독 양육권을 유지하라”는 행정명령을 했다. 매사추세츠주 법원은 아이가 양육권을 가진 부모 모두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부모 중 한쪽이 자가격리 등으로 아이와의 접촉이 제한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화상 통화 등을 통해 아이와 교류할 수 있도록 부모가 협력해야 한다고 공개서한을 통해 강조했다.

지침이 이같이 제각각이다보니 배우자와 이혼 또는 별거 상태인 의료진, 소방관 등은 각자가 알아서 법정 다툼을 거쳐야 하는 상황이다.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 통제 속에서 법원이 휴정하거나 긴급 화상 심리만 여는 경우가 많아 고충은 더욱 크다.

세계일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 설치된 야전병원에서 지난 1일(현지시간) 의료진이 활동하고 있다. 뉴욕 AP=연합뉴스


딸들과 만남이 좌절된 의사 마요킨은 항상 보호장비를 착용하며 귀가 후에는 즉시 빡빡 문질러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고 주장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어떤 환자도 대면 진료하지 말라’는 전남편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딸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병원에 요청해 다시 화상 진료를 하게 됐다. 그는 이 난리통에 힘을 보탤 수 없게 돼 마음이 아팠다면서 “그저 내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픈 마음뿐이었다”고 했다. 법원은 지난 6일 화상 심리 후 마요킨에게 다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동료 소방관 2명이 확진 판정을 받은 뒤 전부인으로부터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항상 코로나19 진단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아오라’는 통첩을 받은 캘리포니아주의 한 소방관도 법정 다툼 끝에 다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이들이 낳은 11살 쌍둥이와 9살 아들은 엄마와 약 60%의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는 아빠와 함께 지냈는데, 법원은 아빠가 코로나19에 걸렸다는 징후를 보이지 않는 한 기존 양육권 결정이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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