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다던 김일성 버젓이 공항에
CNN은 ‘김경희 사망’ 오보 전력
4·15 불참하자 김정은 ‘이상설’
서울발 북한 뉴스 신뢰성 높여야
김정은 유고설 어떻게 생산·유통되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1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 참석 후 열흘 넘게 공개 활동을 중단하면서 신변이상설이 번졌다. 사진은 지난해 2월 말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베트남 동당역에 도착한 김 위원장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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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신변 이상설로 한반도와 주변이 어수선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확산 사태로 전 세계가 긴장하는 와중에 북한 이슈 쪽으로 급선회한 형국이다. 증권시장 마저 출렁였다. 김정은의 잇따른 미사일 도발에도 꿈쩍 않던 국제사회의 시선이 그의 건강 상태에 모인 건 절대권력을 거머쥔 최고지도자의 건재 여부가 곧 북한 체제의 명운과 결부된다는 믿음에서다. 한국 정부와 청와대의 잇따른 부인에도 불구하고 유력 글로벌 매체가 앞다퉈 ‘뭔가 이상하다’며 관련 의혹을 쏟아내고 있고, 서울과 워싱턴·도쿄 등의 대북 관측통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북한 최고지도자를 둘러싼 신변이상설은 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지, 또 어떤 시스템으로 만들어져 확산되는지 짚어보고 대안을 제시해본다.
1986년 11월 중순 서울에선 ‘김일성 피격 사망’이란 충격적 보도가 터졌다. 북한 국가주석 김일성이 암살됐다는 뉴스로 국제 사회는 떠들썩했다. 대통령 주재 긴급 각료회의를 열었고, 북한군 최전방 부대에 조기(弔旗)가 게양됐다거나 김일성의 죽음을 의미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국방부 보고가 이어지면서 사망은 사실인 것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보도 이틀 뒤인 같은 달 18일 김일성은 평양을 방문한 몽골 인민혁명당 서기장 잠빈 바트뭉흐를 맞기 위해 순안비행장에 등장했다. 미군 감청부대의 잘못된 첩보가 진원이라는 주장부터 국방부 책임론, 북한 공작설 등이 쏟아졌지만 미스터리로 남았다. 한국 언론사에는 손꼽히는 대형 오보 사태로 올라있다.
2008년 8월 중순 불거진 김정일 건강 이상설은 북한 권력 구도와 관련해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국가정보원은 “순환기 계통 이상으로 쓰러졌다”고 보고했고, 청와대 고위 인사는 “혼자 양치질은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해 정상적 통치는 불가능한 상황일 수 있음을 내비쳤다. 마침 북한 정권 수립 60주년인 9·9절 행사에 김정일이 불참하면서 신변 이상설은 증폭됐다. 김정일 사망을 암시하는 통화 내용이 대북 감청망에 포착됐다는 소문까지 나오면서 혼선을 키웠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같은 해 11월 공개활동을 재개했고, 아들 김정은으로 후계권력을 넘기는 작업을 본격화했다.
간부 질책 정치국 회의 뒤 모습 감춰
이번 김정은 국무위원장 유고설은 할아버지인 김일성 생일(4월 15일) 참배 행사에 불참하면서 촉발됐다. 집권 첫해인 2012년부터 빼먹지 않던 금수산태양궁전(김일성·김정일 시신 안치 시설) 방문을 거르자 이상설이 나왔고, 호사가의 입에 올랐다. 일부 탈북자나 북한 관련 유튜버들은 나름대로 ‘소식통’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김정은이 극비리에 평양에 들어간 외국 의료진으로부터 큰 수술을 받았다”는 등의 주장을 제기했다. 앞서 11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주재한 김정은이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박봉주 국무위 부위원장을 심하게 질책하는 장면이 조선중앙TV로 공개되면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후유증이란 관측까지 나왔다. 하지만 구체적인 근거나 징후가 없는 상황이라 관망해보자는 견해가 우세했다.
불을 붙인 건 세종연구소 정성장 박사다. 그는 17일 ‘분석자료’라는 글을 통해 김정은 건강에 이상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특히 그는 14일 벌어진 북한의 순항 미사일 시험 발사를 거론하며,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해 김정은이 유고 상태일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세종연구소는 전두환 대통령 집권 시기 그의 아호를 따 만든 일해(日海)재단을 모태로 하는 나름 비중 있는 국가정책 연구재단이다. 이곳의 북한연구센터장 직함을 가진 정 박사의 ‘분석’이란 점에서 서울 주재 외신을 중심으로 관심이 증폭됐다. 물론 세종 측은 “정 박사의 개인 의견에 불과하다”며 선을 긋고 있다. 돌출성 언론플레이를 못마땅해하는 시각도 내부에 있다.
사흘 뒤 나온 미 CNN 보도는 김정은 이상설을 크게 키웠다. 미 고위 관리를 인용한 기사는 “김 국무위원장이 수술을 받은 후 중태에 빠졌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근거 없는 보도’라며 김정은이 간부들과 지방 체류 중이라고 브리핑을 통해 밝혔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우리는 모른다”며 가능성을 일축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는 “CNN이 보도를 내놓을 때 많이 신뢰를 두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사실 CNN은 대북 보도에서 대형 오보를 낸 전력이 있다. 2014년 11월엔 ‘김경희 사망설’을 보도해 큰 파장을 불렀다.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2013년 12월)했는데, 고모 김경희 마저 숨졌다는 점에서 충격을 던졌다. 하지만 김경희는 지난 1월 말 평양에서 열린 설맞이 공연에 김정은·이설주 부부와 김여정(김정은의 여동생) 노동당 제1부부장과 함께 참석했다. 정보 당국 고위 인사는 “김경희 사망설을 주장하던 노동당 간부 출신 탈북자 이모씨가 우리 정부와 갈등을 빚다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CNN이 그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다가 낭패를 본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미 당국의 판단을 토대로 할 때 CNN의 이번 보도도 대형 오보일 공산이 있다. 국제 이슈에서 신속하고 신뢰성 있는 매체로 자리했지만, 북한 문제에선 잇단 고배를 마신 셈이다. 미 외교 전문지 ‘내셔널 인터레스트’의 편집장 해리 카자니아스는 CNN의 이번 보도에 대해 “단 한 곳의 말만 믿고 쓴 건 기사도 아니다. 그것은 쓰레기”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근거 없는 오보인데 외신 실리기도
김정은 관련 오보 사태는 북한 체제의 폐쇄성에 근본 원인이 있다. 정보기관이나 당국이 북한 정보를 이런저런 이유로 신속히 공개 않고 독점하다 보니 문제를 키우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 북한 눈치를 보느라 최고지도자나 그 가족 관련 사안 등 민감한 대북 정보 공개를 꺼리는 경향이 커졌다는 지적도 있다. 북한의 코로나19 관련 실태에 궁금증이 커지고 있지만, 정보당국의 보고나 자료공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전직 정보기관 간부는 “2년 전 판문점 정상회담을 열어 ‘문재인-김정은 핫라인’ 개설 등 남북관계의 새 시대를 공언했던 정부가 대북 정보에 깜깜하거나 북한 감싸기에 연연한다면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뉴스의 출발점이라 할 서울의 대북 전문가와 탈북 인사, 언론 매체의 각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깊이 있는 연구보다는 선정적 분석자료를 만드는 데 치중하고, 믿거나 말거나 식의 유튜브 콘텐츠를 쏟아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언론도 북한 관련 전문 인력 양성과 투자에 나서야 한다. 정부 당국자는 “우리 전문가나 탈북 인사, 대북 매체가 근거 없이 주장·보도한 내용이 며칠 후 미국과 일본의 매체에 크게 보도되는 나쁜 고리를 끊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렇지 못하면 북한 관련 정보를 미·일 당국 발표나 매체에 의존해야 했던 1990년대 이전 상황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경고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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