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투자자 울리는 해적뱅킹] [2] 실적 경쟁에 눈먼 은행들
노후 자금, 자녀 결혼 밑천 등 고령층의 목돈을 고위험 상품에 가입시킨 뒤, 손해가 나든 말든 나 몰라라 하는 은행원들의 부도덕한 행동의 배경에는 은행들의 실적 지상주의가 꼽힌다. 고객보다는 은행 이익을 앞세운 '핵심성과지표(KPI)'가 라임·DLF 사태를 불렀다는 것이다. KPI는 은행이 직원들의 성과를 책정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채점표'다.
◇"당장 나가서 투자자 모집하라", 극한 경쟁이 일상인 은행
한 시중은행 지점 차장인 이모(45)씨는 최근 공황장애가 생겨 병원을 다니고 있다. 지점장 얼굴만 보면 설사나 구토를 하기 때문이다. 지점장은 매일 아침 회의를 열고 영업실적을 체크하며 압박하고 있다. 실적이 좋지 않은 직원에겐 "당장 나가서 투자자를 모집하라"고 윽박지른다. 이 차장은 "지옥 같은 나날"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점장 사정도 모르는 바가 아니라고 했다. 매일 전국의 지점장 실적을 담아 일등부터 꼴등 순위까지 매긴 KPI를 통보받기 때문이다. 3년 동안 평균 하위 30%로 떨어지면 좌천돼 명예퇴직 코스를 밟아야 한다. 은행원들은 자신의 성과급과 승진을 좌우하는 KPI에 죽기 살기로 달려들 수밖에 없다. 은행권에선 "만약 KPI에 '통일'을 넣으면 남북통일도 이뤄질 것"이라는 농담이 돌아다닐 정도다.
/그래픽=김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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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금융감독원의 검사 결과 은행원들이 고위험 상품을 고객들에게 마구 권하며 손실 가능성을 숨기는 것은 물론, 투자 확인서를 아예 조작하는 경우까지 드러났다. 한 은행에선 일부 직원이 인터넷 뱅킹 휴면 고객 수만명의 비밀번호를 무단 변경했다가 적발됐다. 계좌를 활성화해 거래 고객 수를 부풀리기 위해서였다.
◇고객 이익은 나 몰라라 실적에만 목매
서울 여의도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민모(35)씨는 얼마 전 은행을 방문했다가 울화통이 터졌다. 긴급 자금이 필요해 코로나 대출을 문의하러 온 민씨에게 창구 직원이 신용카드 개설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소위 '꺾기' 영업이었다. 돈이 급한 상황이었기에 은행원 요청을 거절 못 하고 카드를 만들어 준 민씨는 "힘들어서 숨이 깔딱거리는 사람한테서 이렇게까지 뽑아먹어야 하느냐"고 허탈해했다.
한 시중은행은 독일국채금리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되는 고위험 금융상품인 DLF를 금리 하락기에도 팔았다. 작년 3월 산하 연구소가 금리 하락을 예측했는데도 직원 교육 자료에 '0.3% 금리 상승이 예상된다'고 기재하고, 5월까지 판매한 것이다. '원금 100% 손실 가능' '위험등급 1등급' 등 경고 내용도 교육 자료에서 뺐다. 총 1255억원어치가 팔린 이 상품은 결국 반 토막이 났다.
이처럼 은행원들이 소비자 이익과 정반대 영업 행위를 하는 건 KPI에서 고객 수익률 배점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고객에게 이익되는 상품을 권하는 게 KPI 점수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에 신한·KB국민·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KPI에서 고객 수익률 배점 평균은 1.2%에 불과했다. 아예 0%인 은행도 있었다. 반면, 전체 배점 가운데 80% 이상이 수익·매출·고객 유치 등에 배정됐다. 고객 대신 은행 영업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말이다.
[윤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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