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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김광일의 입] 문 대통령 "용기 내어 고백하면 용서"… 그러나 '진짜 용기'는 용서할 때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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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의 기념사를 몇 가지로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헌법 전문(前文)에 5·18 민주화운동을 새기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임기 중에 개헌을 하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 발언이다. 둘째. "발포 명령자 규명, 계엄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헬기 사격의 진실과 은폐·조작 의혹과 같은 국가 폭력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내겠다."고 했다. 5·18 진상규명은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한 1988년 국회 청문회를 시작으로 2018년 문재인 정부 때 국방부 조사까지 모두 9차례 있었다. 지금은 ‘5·18 진상규명위원회’가 특별법에 따라 본격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도 발포 명령자와 헬기 사격 여부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과거 10번 조사에서 나오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 앞으로 드러날지 지켜봐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 대통령은 발포 명령과 헬기 사격 같은 것을 ‘국가 폭력’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은 청와대의 대통령 연설문 작성자들이 실수를 한 것 같다. 왜냐하면 ‘국가 폭력’이라고 하는 개념은 때로 국가가 가진 합법적인 고유 기능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작년 연말에 썼던 칼럼의 일부를 인용한다. ‘국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배타성이다. 배타성은 배타적 동일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그래서 동일성은 대내적으로 적용되고, 배타성은 대외적으로 적용된다. 배타성을 발휘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힘이 폭력이다. 그래서 국가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배타적 집단이라고 해도 된다. 국가 안에서 폭력은 관리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폭력을 임의대로 사용하면 국가가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가진 모든 폭력성을 다 거두어서 국가가 총체적으로 관리한다. 국민은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되고, 국가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 국가라는 체제가 유지되려면 경찰과 군대라고 하는 ‘국가 폭력’은 필수불가결하다는 뜻이다. ‘국가 폭력’이라는 개념은 학자에 따라 매우 복잡한 논쟁적 요소를 안고 있다. 자, 청와대가 만든 대통령 기념사에 ‘국가 폭력’이란 용어를 넣었는데, 실수인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보시는가.

문 대통령의 5·18 기념사에서 세 번째 핵심은 이 대목이다. "(학살 책임자들이) 이제라도 용기를 내어 고백한다면 오히려 화해와 용서의 길이 열릴 것이다."라고 한 부분이다. ‘용기’ ‘고백’ ‘화해’ ‘용서’ 같은 매우 부드러운 어휘가 사용됐지만, 이 부분 기념사는 누군가를 강하게 압박하는 분위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청와대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강제 조사가 이뤄지기 전에 당사자들이 고백하는 것이 이 문제를 매듭짓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뜻이다." 지금 180석을 차지한 민주당은 5·18 관련 8개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진상규명 특별법’ ‘역사왜곡 처벌법’ ‘국립묘지 안장 제한법’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진상규명 특별법’은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강제 수사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용기 내어 고백하면 용서의 길이 열린다’는 기념사는 ‘강제 수사에 들어가기 전에 자백한다면 봐줄 수 있을지 검토하겠다’ 정도로 들리는 것이다. ‘용서하겠다’가 아니라 ‘용서의 길이 열린다’고 했다. 만약 관련 당사자가 실제 있다면, 화해의 손길로 느낄까, 아니면 압박이나 협박으로 느낄까.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는가.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남아프리카에 대한 두 가지 꿈이 있다면 그것은 호의와 용서다." 만델라는 조건 없는 화해와 용서만이 남아공의 흑백 인종 갈등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했다. 28년 간 감옥살이를 하던 만델라는 1990년2월 아내의 손을 잡고 감옥 문을 걸어 나왔다. 그는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감옥 문을 나선 뒤에도 계속 그들을 증오한다면,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에 증오심을 내려놓았다." 만델라는 그 뒤에도 "이제 남아공에서 보복은 없다"고 말했다.

내부를 결속시키고 통합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문재인 정부 전반부에 강하게 밀어붙였던 ‘적폐 청산’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와 대립해야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피해도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만다. 만델라는 내부를 결속시키면서 피해를 보지 않을 방법, 그것은 ‘조건 없는 용서’였으며, 간단하면서 어려웠고, 정치적 용기가 필요했다. 때로는 고백할 때보다 용서할 때 용기가 더 필요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1980년 공개적으로 용서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법정에서의 최후 진술도 "나를 마지막으로 정치보복을 끝내라"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광주 민중항쟁에 대해서도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한국이 민주화에 성공함으로써 당시 민주영령들의 한이 풀렸으니 이제는 용서하고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켜 나가자"고 호소한 바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뒤 자신을 핍박했던 사람들을 용서했다. 1992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 씨와 정도경 씨의 결혼식 때는 축하 선물로 ‘답설야중거’라는 한시를 직접 써서 보내기도 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내린 들판을 밟아갈 때에는/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모름지기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말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리라’
문 대통령은 진상규명을 다짐하는 5·18 기념사에서 "처벌이 아니라 역사를 바로 기록하는 일"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재국씨의 결혼식에 써서 보내준 한시, ‘오늘 걷는 발자국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는 그 말씀이 역사를 생각한다는 문 대통령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음미해보길 바란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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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

[김광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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