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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이 땅에 희망을” 민족적·민중적 학문 제창한 ‘모두의 스승’ [김언호가 만난 시대정신의 현인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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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자 김진균

경향신문

1986년 ‘한국사회연구’ 편집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김진균 교수.


1980년 서울의 봄날 오후 김진균 교수를 서울 서대문 네거리에서 만났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신림동 서울대학교에서부터 학생들과 행진해서 거기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들의 민주주의 행진을 환영하기 위해 서대문 네거리에 나가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밤. 궁정동의 정변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져내렸다. 이 땅에 민주주의의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 기대하면서 우리들은 가슴 벅차했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는 우리 모두의 소망을 압살하고 말았다. 1979년 12월12일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찬탈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집권을 위한 위장된 술책이었다.

학생들의 항쟁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해 5월2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광장에 1만 학생들이 모여 ‘민주화대총회’를 열고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면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마침내 5월15일 35개 대학 7만 학생이 서울역에 운집했다. 전두환은 5월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다시 5월18일부터 27일까지 5·18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했다.

‘교수 김진균’은 ‘재경교수 361명 선언’과 ‘지식인 134인 선언’에 참여, 전두환 신군부를 부정함으로써 그해 7월에 해직된다. 그로부터 김진균은 4년1개월 동안 ‘해직교수’가 된다.

■ 해직은 지식인으로서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전두환 신군부 때 교수직 해직
상도연구실 열어 반독재 운동 연대
비판적·진보적 새 학자군 산실로

한길사는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인문·학술 무크지 ‘한국사회연구’를 간행한다. 1년에 한 번밖에 출간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한국적인 아카데미즘을 담아내려 했다. 김진균 교수는 1988년 한국일보 출판문화상을 수상하는 ‘한국사회연구’의 편집위원으로 기획을 이끌었다.

김진균에게 ‘해직’은 고통이었지만, 지식인으로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문제의식을 심화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사회연구’는 선생의 생각과 이론을 논진하는 광장이기도 했다.

나는 1985년 8월10일부터 2박3일, 가야산과 해인사에서 ‘저자와 독자와 출판인이 함께하는 연찬회’를 기획한다. 책을 만들면서, 한 시대의 출판문화란 저자와 출판인과 독자가 함께 창출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책의 문화란 지식인·저자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출판인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출판문화의 한 주체인 독자가 ‘독서’로 참여함으로써 이윽고 가능해진다.

전국에서 독자 40여명이 모였다. 저 옛날 사명대사의 정신과 사상을 기리는 해인사의 홍제암,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 심산의 밤공기가 참가자들의 몸과 마음을 쇄신시켰다. 송건호(언론인), 이호철(소설가), 임헌영(문학평론가), 김진균이 저자들이었다. 여기에 한길사의 편집자들이 함께했다. 심야까지 강의·토론하고 대웅전에서 거행되는 새벽 예불에 참례했다. 오전에 다시 강의·토론하고 오후에 해발 1430m의 가야산을 올랐다. 3일째 되는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김진균 교수가 ‘사회발전이론의 주체적 탐구’를 강론했다.

한길사가 1977년 송건호의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제1권으로 출판하는 ‘오늘의 사상신서’가 1986년 송영배의 <중국사회사상사>로 제101권째를 맞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 사회에서 진전되는 출판문화의 한 풍경이었다. 우리 국가사회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민족공동체의 정신과 이념, 이론과 실천을 성찰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작업이었다. 한 시대에 책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동시대인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해답을 모색했다. 때로는 권력과 충돌하면서 수난을 당했다. ‘오늘의 사상신서’ 101권의 저자·필자·역자 가운데 ‘해직교수’가 10명이고, ‘해직언론인’이 10명이었다. 투옥된 바 있는 필자가 15명이었고, 일시적으로 구금되거나 수사받는 저자·필자도 15명에 이르렀다.

■ 병산서원 지식인대회에서 기조발제

경향신문

1994년 4월15일 4월혁명기념 34주년 토론회에서 발제하고 있는 김진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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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6년 8월11일부터 2박3일에 걸쳐 진행된 병산서원 ‘지식인대회’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앞줄 오른쪽에서두 번째가 김진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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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결성된 민교협 공동의장
4월혁명 계승 연구소 초대소장
국민연합·참교육시민운동·전노협
김낙중·강정구 석방대책위원회 등
1980년대 한국사회 민주화운동
그의 발길 닿지 않은 영역 없어

나는 ‘오늘의 사상신서 101권’을 계기로 우리 민족공동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좀 더 본격적으로 토론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1986년 8월11일부터 2박3일에 걸쳐 안동 병산서원에서 진행되는 ‘지식인대회’가 그것이었다. ‘우리 시대의 학문과 사상의 민족화 문제’를 주제로 삼았다.

‘오늘의 사상신서’의 저자·필자·역자를 비롯해 원로·중견 학자와 젊은 연구자 80명이 서울과 지방에서 모였다. 우리 직원들과 대학원생 30여명이 진행을 도왔다. 강만길 교수(고려대)가 ‘새로운 한국학 정립을 위한 제언’을, 유초하 교수(충북대)가 ‘삶의 운동으로서의 철학적 전개를 위하여’를 발제했다. 김진균 교수가 ‘한국 사회과학의 현재적 과제’를 발제했다.

“새로운 학문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유신체제가 빚어내는 민중적 고통과 학문적 고뇌를 직접 경험했고, 바로 이 유신체제하에서, 다시 그 몰락 이후 엄청나게 상승된 민주화 열망에 부응하는 지식인들의 비판적 시각에 크게 고무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현실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예민한 역사적 감수성을 키웠다. 새로운 이론의 도입·소개에 그치지 않고 비판의식을 학문적 성과로 엮어내야 한다는 사실도 인식했다.”

병산서원 지식인대회에 이어 나는 1987년 ‘해인사 젊은 연구자 대회’를 기획했다. 8월7일부터 2박3일간 홍제암에서 30대 초·중반의 젊은 연구자 50여명이 ‘분단시대의 한국사회과학과 민족운동’을 토론하는 것이었다. 송건호·박현채·김진균·임헌영·유초하 등 선배 지식인들이 울타리로 참여했다.

1987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가 결성된다. 1985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이 교수운동의 조직화 문제는 1986년 8월의 병산서원 토론회에서 유초하 교수를 비롯한 여러 교수들이 심도 있게 의논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진전되는 것이었다. 김진균 교수가 공동의장을 맡는다.

1988년 5월 검찰은 풀빛출판사가 펴낸 <한국민중사>를 ‘이적서적’으로 몰아 나병식 대표를 구속한다. 김 교수는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해 이 책을 변호한다. “우리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지 않고 살찐 돼지로 만족하며 살겠다면 모르지만, 우리 사회가 민주적으로 발전하고 평화통일을 해서 우리 모두가 자유롭고 정의롭게 사는 그런 사회로 가려 한다면, 이런 모든 제약을 벗어나야 하고 불필요하게 힘을 소모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9월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출판해낸 ‘이론과실천’의 김태경 대표가 구속된다. 김진균은 김태경을 변호하는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민교협은 ‘학문·사상·출판의 자유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성명한다.

■ 상도연구실은 진보적인 젊은 연구자들의 산실

경향신문

1999년 8월20일 ‘진보평론’ 창간을 기념해 김세균 편집위원장(왼쪽),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운데)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진균 교수.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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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몰린 ‘한국민중사’ ‘자본론’ 등
법정 변호하며 ‘사상의 자유’ 성명

김진균이 1983년에 문을 연 상도연구실은 스승 김진균과 제자 연구자들의 학문적 중심이 된다. 1984년에 이를 모태로 산업사회연구회가 만들어진다.

상도연구실은 반독재·민주화 운동과 연대하면서 비판적·진보적·실천적 지향과 연구방법론으로 무장하는 새로운 학자군의 산실이었다.

1988년 6월 한양대에서 열린 제1회 학술단체연합회 심포지엄에서 김진균은 ‘민족적·민중적 학문을 제창한다’를 기조발제한다. 사회과학자 김진균의 심화된 문제의식이 동학(同學)들에게 천명되는 중요한 문건이었다.

“우리는 지금 ‘민족적·민중적 학문의 진입을 위한 여정의 출발점’에 서 있음을, 나아가 ‘한국 사회의 민족적·민중적 변혁을 위한 긴 여정의 출발점’에 서 있음을 환기하고자 한다. ‘지식인은 희망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우리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자주·민주·통일’을 소망하는 이 땅의 민중에게 희망을 만들어내는 존재이기를 촉구한다.”

한길사는 1988년 김진균 교수의 <사회과학과 민족현실>을, 1991년에 <사회과학과 민족현실 2>를 펴낸다. 한국지성사에 우뚝 서는 사회과학자 김진균의 1980년대 작업을 담아내는 두 권의 책이다. 선생은 <사회과학과 민족현실>로 1989년 제4회 단재상을 수상한다. 학생 때부터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단재 신채호 등 우리의 근대사상가들을 공부해왔다. 수상 연설에서 단재 선생의 현재적 의미를 강조한다.

“단재 선생의 시대가 마감하지 않고 있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단재 선생이 설정한 이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주체로서의 민중, 그 민중을 곧 민족이라 하고 우리 민족 변혁의 힘을 거기서 찾고자 한 문제설정은 지금도 우리의 민족·민주운동에 중요한 틀을 제공합니다.”

김진균은 1988년 4월, 4월혁명 동지들과 손잡고 4월혁명연구소 설립에 나선다. 초대소장을 맡는다. 4월혁명 30주년을 맞으면서 4월혁명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 계승하는 작업이다. 한길사는 1990년 4월, 4월혁명연구소와 손잡고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전 2권)을 펴낸다.

■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해간 젊은이들 생각하면서

2003년 정년퇴임 이듬해 별세
모란공원 민주화묘역에 안장

일찍부터 다산을 공부해오던 김진균에게 해직은, 다산이 19년 유배를 통해 <목민심서>를 비롯한 수다한 작업을 해냈듯이, 그 스스로 민중의 현실에 한 발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에게 다산은 삶과 학문의 스승이었다. 김진균은 다산의 ‘애절양(哀絶陽)’을 ‘내가 자주 읽는 시’라고 했다. 다산이 강진 유배시절 군정의 문란으로 고통받는 백성이 스스로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현실을 탄식하면서 지은 ‘애절양’! 선생은 “현실에 대해 인식하는 힘이 모자라거나 무디어진다고 여겨질 때마다 이 시를 읽는다”고 했다.

1984년 2학기에 복직했지만 김진균은 더 바빠진다. 민교협 의장, 전노협건설지원 특별위원회 위원장, 국민연합 공동의장, 참교육시민운동 공동대표,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 대표,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 공동대표, 평화주의자 김낙중 석방대책위 공동대표, 진보네트워크 대표, 사회진보연대 대표, 강정구 교수 석방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는다. 이 바쁜 와중에도 <한국의 사회현실과 학문의 과제> <21세기 진보운동의 기획> <진보에서 희망을 꿈꾼다>를 저술해낸다.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저항, 연대, 기억의 정치> 1·2를 펴낸다.

선생은 2003년 1월 ‘마지막 강의’를 하고 정년퇴임한다. 그러나 2004년 2월14일 홀연 서거한다. ‘민중의 스승’ 장례로 마석 모란공원 민주화 묘역에 안장된다. 수많은 학문의 동지·후배·제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민주·민중운동 동지들은 선생이 참으로 엄청난 일을 해냈음을 새삼 각성하게 된다. 선생은 1980년대를 ‘위대한 각성의 시대’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연찬과 실천이 우리를 각성하게 한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운동에서 선생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영역이 없었다. 그만큼 선생의 생각과 삶의 폭은 깊고 넓었다. 선생은 박종철·이한열·김세진·이재호 열사 등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해간 젊은이들 생각으로 늘 가슴 아파했다. 그들의 기념비 앞에 서면 가슴이 더 무거워진다고 했다.

선생은 홀로 하는 작업도 더불어 완성했다. 어울림과 나눔이 그의 도덕적 품성이었다. 시대의 대인이었다. 우리 모두의 친구이고 스승이었다.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김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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