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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이천 화재참사 20일, 또 잊혀져간다…돈도 힘도 없는 노동자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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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은 지금

경향신문

정치인들 근조 화환만 빼곡 이천 화재 참사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경기 이천시 서희청소년문화센터가 18일 텅 비어 있다. 이곳에는 지난달 29일 숨진 38명 희생자의 영정이 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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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국무총리, 여야 당대표, 도지사, 시장, 국회의원…. ‘이천 한익스프레스 참사’ 합동분향소의 벽면은 유력 정치인의 이름이 적힌 근조 화환으로 빼곡히 들어찼다. 앞다퉈 분향소를 찾았던 이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길 때까지 1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참사 3일째 1000여명에 육박했던 조문객도 주말 사이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잊혀가는 것 같아요. 정부에서도 산재사고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고요. 만약 본인의 부모 형제가 이렇게 됐다면 가만히 있었을까…. 여기 노동자들은 돈도 없고 백도 없어서인지 몰라도….”

지난 18일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경기 이천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서 만난 박종필 유가족대책위 대표(60)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문 발길 끊긴 합동분향소에는 38명 영정만 덩그러니
“한 층에 한 명, 안전관리자만 있었어도…” 분노의 한숨
“다 책임지겠다”던 원청업체는 협상 시작되자 태도 바꿔

체육관 단상에는 지난달 29일 숨진 38명의 희생자 영정이 덩그러니 놓였다. 예상치 못한 죽음을 당한 터라 산이나 바다에 놀러가 찍은 스마트폰 사진을 영정으로 쓴 이들이 많았다. 타향에서 숨을 거둔 이주노동자의 영정 앞에는 색종이로 서툴게 접은 카네이션이 놓였다. 19일 현재 희생자 38명 중 28명이 입관 작업을 마쳤다. 유족들은 조만간 사건 윤곽이 드러나면 합동영결식을 치를 예정이다.

박 대표의 동생도 그중 한 명이다. “현장에서 동생 시신을 봤는데 여태 살면서 그런 몰골은 본 적이 없어요.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 어이가 없어서….” 동생에게 이 건설현장에서 일하라고 소개해준 이가 자신이라고 했다.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사고 직후 10여일간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자다 깨면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 미친 사람처럼 엉엉 울었다. “한 층에 한 명, 안전관리자만 있었어도….” 그는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에 이어 똑같은 사고가 반복되는 데는 정부 책임이 크다고 했다.

유가족들은 참사 3일째인 지난 1일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분향소 한쪽에 임시 사무실을 꾸리고 매일 회의를 열고 있다. 생업을 포기하고 대책위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고, 퇴근하자마자 분향소로 달려오는 이들도 있다. “다시는 이런 참사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지만 유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박씨는 말했다.

“경찰에 진행 상황을 물어도 ‘수사 중’이라는 답변만 돌아와요. 고용노동부 관계자나 정치인들도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고요.”

사고 직후 원청인 주식회사 건우 이상섭 대표는 유족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책임지겠다”고 울먹였다. 하지만 여론의 관심이 사그라들고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자, 기업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고 한다.

유가족 법률대리를 맡은 법률사무소 마중의 김용준 변호사는 “원청에 ‘처벌받아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38명이 사망한 사고라면 민형사상 책임을 다하고 적절한 배상을 하는 것이 사업주의 의무”라며 “경찰 수사가 지지부진하고 책임 소재가 규명되지 않다 보니 원청은 배상금 조달 방안도 내놓지 않고 있다. 발주처인 한익스프레스는 민형사상 책임이 없다고 침묵하고, (건우와 계약한) 하청업체들은 도리어 (배상요구에) 화를 낸다”고 말했다.

참사 20일, 유가족들도 지쳐간다. 박 대표는 “유가족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기업과 합의를 이뤄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참사 원인을 확실히 규명하고 책임자가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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