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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소 값 받으러 간 당신, 열흘 만에 암매장 시신으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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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때 교도소 앞 희생자 부인

남편 잃고 한 맺힌 사연 편지낭독

교도소 병력배치 요도 첫 확인

40년전 암매장 진상규명 촉각

중앙일보

지난 18일 5·18기념식에서 최정희씨가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희송 교수가 확보한 ‘교도소 병력배치 요도’. 추후 이 문건은 피격지점이 삭제됐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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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떠난 지 40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그날 일이 생생해요. 당신을 찾아 헤맨 열흘 만에 교도소에서 시신이 된 당신을 만났습니다. 보고 싶은 당신, 우리 만나는 날까지 부디 편히 쉬어요.”

지난 18일 오전 광주광역시 동구 옛 전남도청 앞. 5·18 당시 남편을 잃은 최정희(73·여)씨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최씨는 이날 40주년 5·18기념식에서 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남편을 잃은 사연을 소개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편지 낭독을 끝낸 최씨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지난 세월을 위로했다.

최씨의 남편 고(故) 임은택씨는 80년 5월 21일 광주교도소 앞에서 계엄군으로부터 무차별 총격을 당해 숨졌다. 당시 임씨는 동네 이웃 3명과 함께 소 판매 대금을 받으러 광주로 갔다 귀가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최씨는 사망한 남편이 신군부에 의해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로 몰리면서 또다시 억울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최씨는 “(5·18 당시) 소 장사를 하던 당신이 광주에 수금하러 간다기에 저녁밥을 안치고 있던 참이었는데 밥도 안 먹고 나갔었지요”라며 “그렇게 당신은 밥이 다 되고, 그 밥이 식을 때까지 오지 않았어요. 안 간데 없이 당신을 찾아 헤맨 지 열흘 만에 교도소에서 시신이 된 당신을 만났습니다”라고 했다.

중앙일보

김희송 교수가 확보한 ‘교도소 병력배치 요도’. 추후 이 문건은 피격지점이 삭제됐다. [연합뉴스]


최씨의 남편 임씨는 신군부의 대표적인 5·18 왜곡 사례인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의 희생자다. 당시 임씨 일행은 5월 21일 오후 8시께 담양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계엄군의 총격으로 2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다. 이후 임씨 시신은 열흘이 지난 5월 31일 다른 민간인 희생자 7명과 함께 교도소 관사 뒤 흙구덩이에서 암매장된 채 발견됐다.

신군부는 5·18 이후 임씨 등에 대한 학살을 ‘폭도와의 전투’로 왜곡했다. 88년 국회청문회 당시에는 ‘(80년) 5월 21일 12시20분부터 익일 5시까지 시민군 광주교도소 공격(국보위 합동조사단의 보고서)’이란 내용을 추가해가며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로 폄훼했다.

하지만 올해 40주년 5·18기념식을 앞두고 교도소 습격이 허위임을 증명하는 신군부 측 문건이 첫 확인되면서 임씨 등의 억울한 죽음이 재조명받고 있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광주)교도소 지역 병력배치 요도(5·18)’에 따르면 당시 교도소 앞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피격 위치는 교도소 습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으로 확인됐다.

당시 교도소에 주둔한 계엄군이 표기한 사망지점은 교도소와 멀리 떨어진 광주~담양 간 도로 한복판이었다. 하지만 신군부가 8년 뒤인 88년 청문회 때 공개한 ‘교도소 병력배치 요도’에서는 시민 피격지점을 삭제함으로써 되레 교도소 습격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이용했다.

더구나 이들 사망지점은 교도소 외벽에서도 100m 이상 떨어져 교도소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광주교도소는 외부에 2층 높이인 5m짜리 장벽에 둘러싸인 데다 교도소 입구 밖 50m 지점부터는 장갑차와 소방차·트럭 등으로 철저히 차단됐다. 전남대 5·18연구소 김희송 교수는 “광주교도소가 시민들의 습격을 받은 곳이 아니라 계엄군의 일방적인 양민학살이 자행된 현장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최경호·진창일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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