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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공감]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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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초로 레즈비언과 게이 친구를 만난 것은 서른네 살이 되던 해인 2000년이었다. 6개국에서 모인 기자 18명이 1년간 미국 중부의 한 대학에서 연수를 하는 프로그램에서였다.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 성소수자에 대한 나의 이해는 책과 영화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경향신문

정은령 언론학 박사


레즈비언인 데비는 걸프전 종군기자, 백악관 출입기자, USA투데이의 워싱턴 지국장을 지낸 베테랑 정치부 기자였다. 가족 동반이 가능했던 프로그램에 데비는 자신의 반려인 신디와 함께 왔다. 신디는 IT 전문가였다. “우리 지난 5월에 오리건주 해변에서 결혼했어”라고 두 사람이 말했을 때, 나는 ‘결혼(marriage)’이라는 단어를 처음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합헌’으로 판결한 것이 2015년이니, 두 사람은 한참 앞서 있었던 셈이다. 연수 프로그램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친구로부터 정자를 기증받아 두 딸을 낳았다. 얼마 전 데비는 페이스북에 큰아이의 열여덟 살 생일을 축하하는 커다란 풍선사진과 함께 “다 컸어. 이제 얘도 곧 유권자가 되겠네. 시간이 쏜살같아”라는 포스팅을 올렸다.

브라질에서 온 환경과학 전문기자 에두아르도가 어느 날 “나 게이야”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제 여행 다니면 방을 같이 써도 되겠구나”라며 함께 웃었다. 그는 그때까지 고향의 가족들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고 했다. 낯선 곳에 와서 비로소 자신을 터놓을 수 있게 된 에두아르도는 내게 조심스럽게 새로 시작한 연애 상담을 해왔다.

또 다른 게이 친구였던 C-스팬의 기자 덕은 열렬한 아이스하키 팬이자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말하는 걸 그냥 받아 적어서 옮기면 한 편의 해설기사가 될 거라고 다들 혀를 내두를 만큼 조리있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달변가이기도 했다. 그는 몇 년 전 동성의 배우자를 만나 지금은 워싱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이제는 페이스북으로나 가끔 소식을 나누는 이 오래된 친구들을 요즘 자주 떠올린다. 내가 이 친구들로부터 받은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 생애 최초의 성소수자 친구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충실한 언론인들이었고, 삶의 크고 작은 기쁨을 가꿀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즐거웠고 충만했다. 이 친구들을 만난 덕분에 나는 어떤 사람을 성 정체성으로 규정된 집단의 일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얼굴로 발견할 수 있었다.

이태원 클럽 방문자들의 역학조사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신분노출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거듭 강조되는 것을 보며 나는 언제쯤 한국의 성소수자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두렵지 않게 될까를 생각했다.

성소수자들은 성소수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IT 전문가, 기자, 의사나 교사, 예술가, 기업체의 직원, 법조인 등 그 어떤 모습으로든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일 수 있으며 각자 발 딛고 선 자리에서 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는 데 자기 몫을 다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 정체성 하나만 부각되어, 각자의 고유성은 다 지워진 채 획일적으로 인식될 존재가 아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에 분명히 실재하고 있음에도 덜 가시화되었던 사람들과 사건들을 수면 위로 떠올리고 있다. 내가 잘 알든 모르든, 나와는 다르지만 여기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은, 어떻게 서로의 관계를 새롭게 맺을 것인가를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내게는 성소수자 제자들은 있지만, 한국인 성소수자 친구는 아직 없다. 어쩌면 내가 ‘있는’ 사람들을 ‘없다’고 여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오랜 친구들이 그렇듯이 한국의 성소수자들도 다채롭게 자기 몫의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잘 알든 모르든 모두 여기, 있다.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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