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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송혁기의 책상물림]멈춰 서서 다시 묻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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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던 초등학생 시절에는 글씨를 볼펜으로 쓰는 것도 선망의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연필로 써야 좋은 글씨체를 갖출 수 있다며 볼펜을 못 쓰게 했지만, 어린이는 잘못 쓰는 일이 많으므로 지울 수 있는 연필로 써야 한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노래가 크게 유행한 것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라는 이유가 사랑의 실패를 경험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잘못 써서 지워야 할 일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연필을 어린이의 전유물로 여기곤 한다. 그럴수록 모르는 것, 잘못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석사과정에 재학할 때 일이다. 수업 중에 선생님께서 “이 문제는 일단 궐해 두세”라고 하셨다. 미심쩍은 것은 제쳐둔다는 뜻의 ‘궐의(闕疑)’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학계의 권위 있는 원로로 추앙되던 선생님이셨기에, “모르는 것으로 인정하고 남겨두자”는 의외의 말씀이 더욱 오래 기억에 남는다. 보잘것없는 실력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늘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자세가 되었다.

‘궐의’는 묻지 말고 영영 덮어두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판단 내리는 행위를 우선 멈추고 계속 물음을 던지라는 뜻이다. 정보가 부족하거나 관점이 나뉘어서 합리적 의심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회의(懷疑)를 지속해야지 섣부르게 답을 정하려 들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판단 중지를 뜻하는 그리스어 ‘에포케(epoche)’가 방법으로서의 회의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어온 것처럼, 공자(孔子)는 ‘궐의’의 전제로 ‘다문(多聞)’을 말했다. 끊임없는 질문과 광범위한 정보 수집을 병행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궐의’를 말할 수 있다.

간편하게 접근 가능한 정보의 양이 넘쳐나면서, 자신 있는 판단의 말들이 여기저기 넘쳐난다. 그러나 같은 사안을 두고 매우 다른, 심지어 상반되는 의견들이 확신에 찬 언어로 난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잠시 판단을 유보하고 더 추가할 질문은 없는지, 내가 가진 정보의 질과 양은 과연 충분한지 살펴볼 일이다. 모르는 것, 잘못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멈춰 설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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