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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靑청원 '초등생이 25개월 딸 성폭행'에… 53만명 속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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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게시판 허위·조작에 무방비… 이대로 괜찮나]

엄마 "가해학생 처벌해달라" 호소

경찰 조사결과 가해자 존재 안해… 메신저 내용조작 등 '허위'로 판명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엄마 입건

"25개월 딸이 이웃 초등학생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학생과 부모를 처벌해달라고 올린 글이 경찰 수사 결과 거짓으로 확인됐다. 해당 청원은 53만명 이상의 추천을 받았다. 청와대 측은 19일 "허위로 판명 난 청원"이라며 "국민청원의 신뢰를 함께 지켜내주길 당부드린다"고 밝혔다. 청와대 게시판이 '국민 참여로 의제를 만들어간다'는 취지와 어긋나게 여론몰이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또다시 제기되고 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여성청소년수사계는 이날 국민청원 게시판에 '저희 25개월 딸이 초등학생 5학년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30대 여성 A씨를 형사입건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씨의 글은 본인 거주지와 딸이 있다는 사실 외에 모두 허위였다. 가해자는 가공인물이었으며, 가해 학생 부모와 주고받았다며 공개한 메신저 내용도 조작이었다.

문제의 글은 지난 3월 20일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다. 익명으로 글을 올린 A씨는 "경기 평택에 거주하는 두 딸의 엄마"라며 "지난 17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의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놀러 와 하룻밤을 자고 갔다. 다음 날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려는데 아이가 생식기가 아프다고 했다"고 밝혔다. 또 "병원에 가서 의사의 소견을 듣고 치료와 함께 약을 받았다" "가해 초등학생의 스마트폰에서 성인 앱과 성적인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봤다"고도 했다.

A씨는 특히 "학생의 부모가 응대한 어이없는 카카오톡 내용"이라며 10차례 이상 주고받은 대화 내용도 소개했다. 대화에 따르면 학생 부모가 "마음대로 해라" "우리 아들이 했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답을 보냈다. A씨가 올린 글은 만 하루 만에 20만명 이상의 추천을 얻었다. 30일이 지난 4월 19일 청원을 마감할 때에는 53만3883명이 동의했다. 그러나 글이 올라온 직후 내사에 착수한 경찰이 A씨를 찾아내 확인하는 과정에서 거짓이 탄로 났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처음에는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가해 학생의 이름과 주소를 댔다. 그러나 확인 결과 가공의 인물이었다. 이달 초 2차 면담에서 A씨는 결국 허위 청원을 했다고 시인했다. 경찰은 일단 A씨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지적장애 등의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동기에 대해 추가 조사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A씨의 사례는 우리 사회의 공적인 사법·입법 절차보다 청와대 게시판을 통한 여론몰이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부작용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개정 논란이 일고 있는 '민식이법'의 제정도 지난해 10월 부모가 올린 국민청원에서 시작됐다. 스쿨존 교통사고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불붙으면서 국회 입법까지 진행됐다. 그러나 최근 "스쿨존에서 아무리 시속 30㎞ 이하로 주행해도 중간에 무단횡단하는 어린이는 피하기 어렵다"며 재개정을 촉구하는 국민청원이 제기됐다. 이 글은 애초 민식이 부모의 글이 받은 추천 11만2789명보다 더 많은 35만명의 추천을 받았다.

어린이 안전사고 피해자에 대한 응급처치를 의무화하는 이른바 '해인이법'의 조속한 입법을 요청하는 청원에 민갑룡 경찰청장이 "촘촘한 사회공동안전망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는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허위 청원, 여론 조작 사례는 잇따라 불거지고 있다. 지난 2월 22일 '동생이 경기도의 한 공원에서 청소년들로부터 폭행과 감금을 당했다'는 청원이 올라왔지만, 경찰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협박 증거라며 공개한 메신저 내용도 조작된 것이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글 작성자를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지난달 10일에는 '충북 청주시가 복지시설인 충북희망원의 고아들을 탄압했다'는 내용의 청원이 게시됐다. 청주시는 항의 전화가 빗발치자 사실관계 파악에 들어갔으나 이 역시 허위로 밝혀졌다. 청주시는 게시자를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전문가들은 사실과 달라도 동의자가 많기만 하면 힘을 얻는 국민청원 게시판 운영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진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확증 편향과 여론몰이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며 "청와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과도한 믿음이 원인"이라고 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119에 허위 신고를 해 예산을 낭비하는 것과 다름없는 문제"라며 "개인이 공적 영역을 우롱하는 것을 방치해선 안 된다"고 했다.



[수원=권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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