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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김 부장은 왜 1년만에 중국에서 돌아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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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박소연 기자] [편집자주] 미국 트럼프 정부가 미국 기술을 활용한 반도체 부품을 중국 최대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에 공급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또다시 미중 무역전쟁의 전운이 감돈다. 중국의 반도체 사업은 더욱 '독자생존' 길을 걷고 한국 기술인력 사냥은 한층 노골화할 전망이다. 직접 개발하는 것보다 베끼는 것이 '더 낫다'고 믿는 중국의 한국 기술인력 스카웃을 집중 조명해본다.

[MT리포트-중국 인력 블랙홀 '천인계획']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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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 A사 출신인 김영철(가명,49) 부장은 2년 전 중국 땅을 밟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중국의 한 디스플레이업체 자회사로 스카웃 됐는데 한국에서 받던 연봉의 2.7배와 자녀 교육비와 거주비를 별도로 제공받는 조건이었다. 무엇보다 김 부장은 '기본 3년' 계약에 추가로 얼마든지 고용을 연장할 수 있다는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 김 부장은 고심 끝에 중국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국의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자녀들까지 모두 데리고 중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김 부장은 단 1년 만에 중국의 실상을 뼈저리게 통감해야 했다.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김 부장을 스카웃 했던 중국 기업은 당초 제시한 조건과 달리 1년 만에 김 부장을 해고했다. 김 부장의 효용 가치가 기대 이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 부장은 "일방적 계약 파기였지만 외국인으로 현지에서 소송을 하는 것은 엄두도 내기 힘들다"며 "최소 3년 이상 중국에서 경력을 쌓으려고 했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토사구팽' 알고도 떠나는 이유

김 부장의 사연은 디스플레이 업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중국 업체가 파격적인 조건으로 한국 엔지니어들을 유혹해 고용한 뒤 필요한 기술만 빼내고 '토사구팽' 한다는 사실은 이제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한국 연구진과 기술진의 중국행은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그만큼 중국의 한국 인력 스카우트가 블랙홀처럼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중국은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첨단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 최고 국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디스플레이, 반도체, 배터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 기술을 보유한 한국 인력을 사냥한다. 검증된 인력을 손에 넣는 것이 신기술 습득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무기는 돈이다. 막대한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업체들은 기존 연봉의 3배 이상 고연봉과 거주비, 교육비 등 파격 대우를 내걸고 한국의 우수 인력을 빼가고 있다.


진화하는 스카우트 수법…"인력유출 집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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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 방식도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BOE 같은 중국 대기업의 한국 지사가 자체 네트워크를 활용하거나, 국내 협력업체를 통해 소개 받던 방식은 지양하고 있다. '동종업계 재취업 금지' 같은 견제가 심해 이 방법을 썼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아예 한국 업체가 이직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자회사나 연구기관, 컨설팅업체 소속으로 한국 인력을 위장 취업시키는 수법이 많이 쓰인다. 한국 업체들이 중국 기업으로 넘어간 자사 인력을 파악조차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삼성디스플레이가 2018년 제기한 전직 금지 가처분신청 소송의 당사자였던 OLED 패널 관련 퇴직자도 삼성디스플레이의 경쟁사인 중국 BOE의 협력사 청두중광전과기유한공사(COE)에 입사하면서 문제가 된 케이스다.

한국 법원은 당시 COE의 대주주가 BOE와 같고 회사 건물도 BOE 생산공장과 6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데다 급여를 지급한 회사 이름이 은행거래 내역에 기재되지 않은 것 등을 이유로 BOE에 우회 취업한 것으로 판단해 '전직 금지' 처분을 내렸다.


中 연봉 20배 줘도 '남는 장사'…이직 막는 것 한계

업계에서는 중국업체들의 한국 기술진 대우가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나오지만 기존 연봉의 3~4배를 제시하는 것은 여전히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한국에선 경쟁이 치열하고, 정년보장도 어려워 중국을 기회로 여기고 이직을 택하는 직원들에게 무조건 '산업스파이'로 몰아세우는 것은 가혹하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이 한국 기술진에 대한 전략적 스카웃에 나선 지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 한국 기업들은 뾰족한 처우 개선을 해주지 못한다.

때문에 중국의 인력 사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다. 한국에서 5년간 100명이 함께 개발한 핵심기술의 경우 기업이 지출한 연봉 기준으로만 해도 수 백억원의 값어치가 있는데 중국은 한국인 개발자 1명의 연봉으로 10배를 제시하더라도 훨씬 비용이 적게 드는 셈이다. 설계도면 등 자료를 빼돌리는 행위는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라 처벌되지만 단순히 회사를 옮겨 노하우를 전하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인력 신진대사"…국내 여건 만들어야

지난해 한국으로 돌아온 김 부장은 중국 업체로부터 고용 계약 파기에 따른 위자료 명목으로 한달치 급여만 받았다. 중국으로 취업했다는 '꼬리표'가 붙어 김 부장은 한국 재취업은 꿈도 못 꾼다.

서광현 디스플레이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40~50대에 퇴직한 사람들은 중국으로 한번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며 "고용을 유지하고 특허 기술개발에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게 절실하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오래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노화욱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장은 "중요한 건 전문 인력의 신진대사"라며 "매년 삼성과 SK하이닉스에서 반도체 인력이 수 백 명씩 나오는데 이들이 한국에서 계속 일할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소연 기자 soyunp@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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