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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편집국에서] 아파도 못 쉬는 나라, 이대로 둘 건가 / 황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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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황보연 ㅣ 사회정책부장

“여기선 아프면 출근하지 않아도 돼요.”

2015년 겨울,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한 블루베리 농장에서 만난 20대 청년 ㄱ은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냉큼 이렇게 답했다.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떠난 청년들을 취재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ㄱ은 한국에서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하는 일자리를 전전하다 호주에 왔다고 했다. 선진국 중에서도 높은 수준인 ‘호주의 최저임금’을 꼽을 줄 알았던 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열이 날 때가 있는데, 한국에선 당일에 휴가를 내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어요. 이곳에선 그게 되더라고요.”

5년 전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우리가 여전히 ‘아파도 못 쉬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대유행은 새삼 이런 문제를 각인시켜준 계기가 됐다. 특히 지난 3월 서울 구로구 콜센터에서 벌어진 집단감염은 일종의 도화선이 됐다. 의심증상을 보인 콜센터 직원이 “당일에 연차 신청을 내면 감점 사유가 된다”는 이유로 조퇴하지 않고 계속 일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밀집도가 높은 콜센터 사무실에서 직원들의 건강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 코로나바이러스는 대규모 전파를 일으켰다. 급기야 ‘아프면 쉰다’는 온 국민이 지켜야 할 1순위 방역수칙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정작 수칙을 지켜야 할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지난달 12일부터 26일까지 정부가 ‘코로나19 생활 속 거리두기 행동수칙’에 대한 국민 의견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가장 지키기 어렵다고 한 수칙이 바로 ‘아프면 3~4일 집에서 쉬기’였다. 외려 국민들은 되묻는다. “3~4일 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사업주가 출근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요?” “아픈 사람을 방치했을 경우 기업과 사업주에게 부과되는 강력한 조치가 있나요?”

실제로 국내에선 아프면 쉬도록 하는 제도적 지원이 전무하다. ‘업무상 이외의 부상이나 질병’에 걸렸을 때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는 규정이 없고 상병수당도 도입돼 있지 않다. 대기업 일부만 유급병가 제도를 갖추고 있을 뿐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비교한 결과는 좀 더 충격적이다. ‘아플 때 쉴 수 있는가’와 ‘소득을 지원받는가’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어떤 지원이나 규제도 갖추지 않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우리처럼 상병수당이 없는 미국조차도 노동자가 병가를 쓸 수 있도록 하는 규제를 두고 있다.(‘질병으로 인한 가구의 경제활동 및 경제상태 변화와 정책과제’ 보고서)

불안정한 일자리에 있을수록 아파도 참는 경우는 더 빈번하다. 소득 감소와 실직의 위험을 택하느니 참고 일하기 때문이다. 김기태·이승윤의 연구보고서 ‘아픈 노동자는 왜 가난해지는가’(2017)는 아픈 노동자가 빈곤의 경로를 밟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코로나19에 확진된 콜센터 직원들의 동선을 통해서도 주말에 쉬지 않고 일하느라 최소한의 휴식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목격한 바 있다. 바이러스 전파를 차단하는 것 말고도 제도개선을 추진할 목적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정부 대응은 미적지근하다. 두 달이 넘도록 구체적 설계도를 내밀지 않고 있다. 국민건강보험법 50조(부가급여)의 시행령에 상병수당을 추가하는 방안은 당장 정부가 나설 수 있는 것이지만, 재원조달 방안(8천억~1조7천억원) 등을 근거로 난색을 표한다. 그러는 사이 6일부터 적용된 생활 속 거리두기 수칙은 아프면 ‘출근하지 않기’에서 ‘출근 자제하기’로 초안보다 문구가 완화됐다. ‘아프면 쉰다’는 방역수칙을 강조할 때와 달리, ‘아프면 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는 적극적이지 않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아프면 쉰다’는 일터만 바꾼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우리는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아파도 나온다’를 배운다. 입시로 일찌감치 경쟁사회에 스며드는 아이들은 이미 ‘아파도’ 학교에 나오는 게 익숙하다. 유급병가나 상병수당 도입 말고도 풀어야 할 더 큰 숙제가 남아 있다는 얘기다.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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