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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대형병원 쏠림 탓 공공의료 붕괴 우려…‘1차 의료’ 보완 먼저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의료의 새로운 방향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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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묵은 원격진료 논란 재점화

경향신문

2016년 보건복지부에서 진행한 원격의료 시범사업의 모습. 간호사가 중증장애인 집에 방문해 증상을 확인한 후(왼쪽 사진), 병원에 있는 의사와 영상통화를 하며 협진을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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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 속 정부 “긍정 검토” 발언에 수면 위로
현 의료법에 금지된 ‘의사와 환자 간 진찰행위’가 쟁점
원격 가능 진료 영역에 대한 세부적 기준도 마련돼야

‘원격의료’를 둘러싸고 벌어지던 10년 묵은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 13일 김연명 청와대 사회수석이 한 강연 자리에서 “원격의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최근에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다. 바로 다음날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이 “기재부도 비대면의료(원격의료) 도입에 적극 검토가 필요하다는 기본 입장을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다”고 논의를 이어받으면서 판이 커졌다.

한국 사회에서 원격의료 도입 논란이 시작된 것은 10년쯤 전부터지만, 그간 별다른 진척은 없었다. 18·19·20대 국회에서 모두 원격의료를 허용하자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이 정부·여당을 중심으로 발의됐으나, 야당·보건의료시민단체·의사단체가 반대하면서 법안이 통과된 적은 없다. 원격의료 도입을 찬성하는 이들은 의료접근성과 편의성이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반대 측에서는 오진 가능성과 의료민영화를 우려한다.

최근에는 코로나19라는 변수가 논의에 얹어졌다. 병원 내 감염 방지를 위해 지난 2월부터 원격의료의 일종인 전화상담과 처방이 한시적으로 허용됐는데, 지난 10일 기준으로 약 26만건의 상담·처방이 이뤄졌다.

원격의료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를 두고 원격의료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비대면’과 ‘원격’, 다르지 않아

원격의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그 정의부터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우리가 도입하려는 건 원격의료가 아니라 비대면의료”라고 주장한다. 비대면의료는 원격의료와 다른 것으로 봐야 할까.

원격의료의 기본 개념은 의사가 통신수단을 이용해 진찰하는 것이다. 원격의료의 종류는 행위 주체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의사-의사나 의사-간호사 등 의료진 사이에 원격의료 행위를 하는 것과 의사-환자 간에 원격의료 행위를 하는 것이다. 정부가 원격의료 모범 사례로 드는 경북 문경 생활치료센터 사례는 센터에 상주하는 의료진이 서울에 있는 의료진에게 흉부 엑스레이 등 의료 데이터를 전송해 의료진 간에 원격의료 협진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행 의료법에 정의된 원격의료는 ‘컴퓨터·화상통신 등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여 먼 곳에 있는 의료인에게 의료지식이나 기술을 지원하는 행위’로 의사-의사·간호사 간 원격의료만 허용하고 있다.

쟁점이 되는 원격의료는 의료법에 의해 금지된 의사와 환자 간 진찰 행위다. 의사가 환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 전화나 영상통화로 진찰을 하고 처방까지 하는 ‘비대면진료’, 기저질환이 있는 만성질환자에 대해 주기적으로 혈압 등 증상을 파악하며 모니터링하는 ‘비대면 모니터링’이 있다.

전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정부와 청와대는 스마트진료나 비대면진료라고 부르면서 원격의료와 선을 그으려 하지만, 의사와 환자가 대면하지 않고 진료를 보는 행위는 법적 정의에 따르면 원격의료”라고 말했다.

■“의료접근성” vs “오진 가능성”

원격의료 도입 찬성의 핵심 주장은 ‘의료접근성’이다. 체외 부착 전자장치(웨어러블 디바이스)를 통해 체온, 혈당, 혈압, 심전도 등을 측정해 병원으로 실시간 전송하거나, 가정 내에 설치한 원격진료 장치를 통해 의사가 원격으로 진료할 경우 의료접근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는 것이다. 2018년 발의된 의료법 개정안에도 “섬, 벽지에 사는 사람이나 해상에 나가 있는 선원, 거동이 어려운 노인 또는 장애인 등에 대해서는” 원격의료를 활용하자는 취지가 담겼다. 그간 정부 부처에서 시행해온 원격의료 시범사업도 거동이 어려운 중증장애인, 원양어선 선원, 교도소 재소자 등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하지만 보건의료계는 발달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격의료는 대면진료에 비해 오진의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고 판단한다. 김대하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는 “연세가 많거나 질병 정도가 중한 환자의 경우에는 커뮤니케이션의 한계가 분명하다”며 “심전도 체크만 해도 검사실에서 하는 것과 체외진단기기가 하는 것의 정확도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차가 크다”고 설명했다. 대면진료 시에는 오진으로 인한 책임을 의사에게 명확히 물을 수 있으나, 원격의료로 오진이 발생할 경우 그 책임을 의사에게 물어야 할지 기기 제조업체에 물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1차 의료 보완이 우선”

하지만 무엇보다 의사단체나 보건의료시민단체들이 가장 우려하는 지점은 공공의료체계의 붕괴다. 보건의료단체들은 원격의료를 이야기하려면 공공의료 확충과 주치의제도 도입 등 1차 의료기관 중심의 의료전달체계 정비가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감염병 환자처럼 수익이 나지 않는 환자를 위해 신속하게 병상을 비울 수 있는 공공병원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는데, 정부가 공공병원 확충에는 속도를 내지 않고 원격의료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건강연구소는 “거동이 불편하고 거리가 먼 곳에 사는 환자, 노인, 장애인 이야기를 자꾸 하는데 왕진, 방문보건, 주치의제도, 기초공공의료 확충이 되면 보완적 수단인 원격의료를 반대할 어떤 이유도 없다”고 짚었다.

의료계는 그 전제가 충족되지 않은 채 원격의료가 허용되면 3차 병원인 대형병원으로 환자 쏠림이 심해져 ‘동네병원’ 중심의 공공의료체계가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국회입법조사처에서 2016년 내놓은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 도입의 쟁점과 향후 과제’ 보고서도 이 같은 점을 지적했다. 원격의료를 시행하려면 화상진료 장비 등 서비스 구현을 위한 하드웨어를 갖춰야 하는데, 투자여력이 있는 대형병원이 이 사업에 주로 뛰어들 것이라는 예측이다. 동네의원 방문 후 질병 중증도에 따라 2차·3차 병원으로 향하는 것이 현재의 의료전달체계인데 환자와 대형병원을 바로 연결하는 원격의료는 현재 의료전달체계 방향과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재부나 중소벤처기업부 등 경제부처는 원격의료를 ‘비대면산업’을 활성화시킬 수단으로 보고 접근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기재부의 ‘제1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 보도자료를 보면 정부는 원격의료, 원격교육 등을 비대면산업(untact industry)으로 규정하고 규제를 혁파해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코로나19를 계기로 기재부가 의료산업 부흥을 위해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에크모나 방호복 등 필수의료장비의 국산화”라며 “실체 없는 원격의료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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