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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편집국에서]빈자나 부자나 모두 ‘한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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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는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재난과 같다. 원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기에 마땅한 대책도 없다. 그저 그 시간을 버티며 견뎌낸다. 그래서 앓는다는 건 버티는 것이다. 지금 ‘코로나의 시절’을 지독히 앓고 있는 인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은 이전부터 이미 앓을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늙든 젊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문학작품들 속 무수한 ‘앓는 삶’들이 이야기한다.

경향신문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한국 사회는 더욱 그러하겠지만, 세계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세계가 안전하지 않다는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이전과 똑같이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사회는 재난을 만났을 때 힘을 확인한다. 재난이 거대할수록 실감도 통렬하다. 내부의 진실도 마주하게 된다. 효율과 성장으로 강한 국가·사회를 만든다는 글로벌 자본주의 신화는 코로나19로 무력해졌다. 한순간에 찢겨버린 자본과 상품의 그물망 앞에서 ‘미신’이 됐다. 코로나만큼이나 두려운 절대적 빈곤의 엄습 징후에 인류는 떨고 있다. “자본주의에 있어 불황이란 고맙고도 시원한 두쉬(Dusche·소나기)와도 같은 것”이란 슘페터의 위로가 현실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삶들이 앓다가 사그라질지 모른다.

그래서 재난을 기점으로 거대한 사회적 변화가 온다. 세상이 낯선 것이 되었을 때 인류의 유전자는 급변한다. 재난은 시련이지만, 인류 진화를 재촉하는 도전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위기와 적응은 인간의 생존을 가능케 한 근원적 힘이었다.

코로나19가 일깨운 몇 가지 진실이 있다.

우선 근대 이후 인류 사이 밀집도를 높여온 세계의 구성은 감염병 상황에서 극도로 취약한 체제임이 명백해졌다. 코로나19의 사망률을 높인 것은 병원체의 강력함이 아니다. 폭발하는 감염에 의료체계가 따라가지 못하는 ‘한계 초과’의 탓이 크다. 치료는커녕 진단도 받지 못하고 집에서 스러져간 죽음들이 그러하다. 세계 곳곳에서 인간은 무력했고 참담했다. 효율과 영리에 의료를 맞춘 곳일수록 참담함의 크기는 컸다. 코로나와 같은 ‘창궐’의 상황에 인류가 맞서려면 사회가 늘 일정한 ‘의료 여력’을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의료 예비군’은 민영의료 체계에선 상상조차 힘들다.

인류 삶과 일의 모습도 크게 변할 수밖에 없다. 대면 접촉 중심의 세상은 종언을 고했다. “이번 코로나 사태의 최대 승자는 ‘쿠팡’ ”이란 농담처럼 디지털 사회는 더욱 급격하고 난폭하게 다가오고 있다. 인간은 밀집 속에서도 하나하나 분절·고립된 ‘섬’들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언택트(Untact)’는 곧 ‘온택트(Ontact)’가 된다.

이 모든 변화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소비의 창출’이다.생산·소비 경제의 금 밖으로 비켜난 존재들의 생계는 어찌할 것이냐는 문제이다. 섬처럼 고립된 존재도 먹고, 입어야 한다. 또한 그런 소비 부대가 없는 생산 경제는 존재하기 힘들다. 소비와 생산을 계속 돌리기 위한 ‘부’는 어디서 가져올 것인가.

그래서 ‘기본소득’ 이야기는 ‘운명적’이다. 코로나19와 무관하게 곧 다가올 운명이었다는 의미다. 실리콘밸리의 IT기업가들이 앞장서 기본소득을 주창해온 것도 그런 이유다. 소위 그들의 ‘혁신 엔진’을 돌리기 위해선 상품을 소비할 무수한 섬들은 필수적이다. 물론 기본소득이 이렇게 재난과 함께 성큼 다가올 줄은 몰랐다.

실상 코로나19가 인류에게 준 경고는 기본소득의 문제를 훨씬 뛰어넘는다. 핵심은 신자유주의 이후 해체되고 있는 ‘사회’의 복원이다. 코로나19는 사회와 자본의 관계 재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민영화가 가장 먼저 파괴한 것이 공공성이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이 작동한 한국과 철저히 의료를 민영화한 미국의 차이는 이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민영화의 창의와 효율은 거짓이었다. 공공성을 해체하고 사회를 무력한 개인의 조각들로 전락시켰을 뿐이다. 자본은 그 위에서 갑질하며 군림했다. 그런 세상은 ‘인류적 재앙’을 감당할 수 없다.

‘코로나 뉴딜’의 정수는 ‘사회의 강화’가 되어야 한다. ‘자본은 사회를 위해 존재하며 사회의 것’이란 오랜 인간의 정의로 복귀하는 것이다. 사회의 자본 통제, 자본의 사회적 복속·기여야말로 핵심이다. 다행히 지금 인류는 서로의 ‘연약함’에 공감하고, ‘연대’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부자나 빈자나 모두 지구라는 한배를 탔음’(차드의 시인 달렙)을 진심으로 감각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인류의 가장 큰 진화는 바로 그것이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lubof@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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