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젊은 두 남녀의 시선인 척하지만 막상 조감되는 것은 나이 먹은 남자의 비루한 욕망이다. “왜 이렇게 젊은 여자들은 나이 든 남자를 좋아하지”라고 투덜거리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중년 남성들은 20대 여성에게서 젊음만을 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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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종영했다. 원작인 <닥터 포스터>를 쓴 작가 마이크 바틀렛은 그리스 신화 <메데이아>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메데이아>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 중 가장 정열적인 여성 캐릭터이다. 그녀는 이아손에게 반해 아버지를 배신하고, 국보를 빼돌렸으며 심지어 동생을 죽여 그 시신을 산산이 찢어 버린다. 이아손을 사랑했기 때문에 메데이아는 조국, 고향, 가족 모두를 버리고 이아손을 돕는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
그런데 이아손이 새로운 권력자의 딸과의 재혼을 발표한다. 메데이아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까지 먼 곳으로 쫓아내려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린 메데이아에게 갈 곳이란 없고, 기댈 곳도 없다. 결국 메데이아는 새신부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고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유일한 혈육인 자녀들을 칼로 찔러 죽인다. 남편의 외도에 복수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자식을 죽인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사실 그다음이다. 자기 손으로 자식을 죽인 여자 메데이아를, 이상하게도, 신들이 구출해준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메데이아>는 이런 광경을 두고, “신들은 예상치 못한 많은 일들로 우리 인간들을 놀라게 하는구나! 우리가 기대하는 일,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 인간이 생각지도 못한 일, 신의 뜻으로 이루어지는구나”라고 한탄한다. 인간의 선택은 실수투성이라지만 때로 신은 더 잔혹한 일을 계획하고 허락하기도 한다.
신이 주사위를 던져 운명을 정한다면, 인간으로서 작가, 예술가는 그저 인간이 저지른 실수를 변명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학과 영화가 인간의 고상한 면만을 담을 수는 없다. 오히려, 작가와 감독이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의 추악하고, 엉뚱한 면일 테다. 창문만 있고 문이 없는 인간이라는 집에 문을 달고, 문고리를 달아 주는 것. 인간이라는 비밀에 들어가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고,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 어쩌면, 그게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작가 스스로가 그 ‘잘못’을 저질러도 되는 것은 아니다. 감독 우디 앨런만 해도 그렇다.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개봉해 소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우디 앨런이 2018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티모시 샬라메, 셀레나 고메즈, 엘르 패닝처럼 젊고 재능 있는 배우들이 주연을 맡고, 주드 로, 레베카 홀 등 실력 있는 중견 배우들이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개봉은 지지부진 밀렸고, 결국 미국보다 먼저 유럽에서 선보였다. 2017년 말, 그의 수양딸이었던 딜런 패로가 어린 시절 우디 앨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사실 우디 앨런의 추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또 다른 수양딸과의 스캔들을 합법적 결혼으로 대응했지만 어쩐지 이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궤변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부도덕은 작품이 훌륭할 때 더 곤란하다. 그동안 몇몇의 우디 앨런 영화는 이런 상황에 부합했다. 하지만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작품으로 보더라도 여러 흠결과 한계가 많다. 영화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뉴욕이라는 도시를 조망했다는 건데, 그마저도 속 빈 강정처럼 허무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뉴욕 곳곳은 팬시한 패션 잡지처럼 겉핥기에 불과하다. 뉴욕이라고 생각하면 떠오르는, 관광엽서처럼 뻔한 뉴욕이 뻔한 시선으로 그려질 뿐이다.
뻔하다 못해 젊은 여성 캐릭터를 사용하는 방식은 부도덕해 보인다. 영화 속에서 엘르 패닝은 남서부 지방의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한 여대생으로 등장한다. 학보사 기자인 그녀는 뉴욕의 중년 남성 셀럽들 앞에서 맥을 못 춘다. 이유는 두 가지다. 촌뜨기로 뉴욕의 세련됨에 항복하고 출세한 남성들의 이름값에 굴복하는 것이다. 사실 엘르 패닝이 맡은 캐릭터는 실제 존재하는 20대 여자 대학생의 모습이라기보다 중년의 아저씨들이 기다리고 있는, 환상의 그녀에 가깝다. 사회적 명망과 지위, 세련된 문화적 태도에 20대 여성이 완전히 반하는 상황 자체가 아저씨의 욕망이라는 의미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성공한 중년의 남자들이 학보사 20대 여성 기자에게 바라는 게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창조력에 한계를 느낀 감독은 영감을, 상처 입은 시나리오 작가는 위안을, 인기를 확인하고픈 배우는 육체를 원했다지만 사실상 모든 중년의 인물들이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다 하나다. 바로 젊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레이니 데이 인 뉴욕>에 등장하는 모든 중년 남성들은 20대 여성에게서 젊음만을 탐한다. 여성의 젊음만이 교환되고 소비될 뿐, 정작 말하고 싶은 바는 남자와 말이 통하는 여자란 드물다에 멈춘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바야르는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에서, 어떤 장소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 그곳을 방문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고 말한다. 두 눈으로 보는 여행이 시선에 점유될 수 있다면 오히려 방 안에서 간접적으로 하는 여행이 전체적인 그림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디 앨런은 뉴욕을 와서 봐야만 뉴욕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눈을 통해 뉴욕을 중계하고자 한다. 하지만 막상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젊은 두 남녀의 시선인 척하지만 막상 조감되는 것은 나이 먹은 남자의 비루한 욕망이다. 때로 영화의 볼거리는 미끼용 눈속임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젊은 여자들은 나이 든 남자를 좋아하지”라고 투덜거리지만 이는 거꾸로 읽는 게 옳다. 그런 맥락에서, 재즈나 뉴욕은 남루한 욕망을 감추는 위장막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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