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 뇌, 엄청난 정보 처리… '사실' 분별력은 점점 무뎌져
목소리 큰 자, 권력 가진 자… 과거마저 바꾸려 드는가
신동흔 문화부 차장 |
얼마 전 회원수 1만4000명의 '○○타운 입주자 카페'에 "다 같이 돈 모아 정의연을 돕자"는 글이 올라왔다.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자와 정의기억연대를 둘러싼 의혹이 뜨거워지던 무렵이었다. 바로 댓글이 하나 붙었다. "이 단체 지금 논란 있는 곳 아닌가요? 자금 사용 투명하게 공개하면 좋을 텐데…." 그러자 3~4명이 번갈아 "논란의 배후가 누군지 찾아보세요" "기레기(기자를 비하하는 용어)들이 공격하는 걸 보니 후원해야겠네요" "언론은 변한 게 없죠" 같은 글을 올렸다. 몇 명이 더 가세하자 정의연은 순식간에 '억울한 피해자'가 됐고, 곧 후원금 모금 공지가 떴다.
이런 일에는 숨겨진 메커니즘이 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지인이 직접 겪은 일이다. 그는 서울의 한 '맘카페'(육아정보 공유 커뮤니티) 게시판에 "(정부는) 왜 중국인 입국을 막지 않냐"는 글을 올렸다가 봉변을 당했다. 회원 몇 명한테서 비밀 쪽지를 받았는데, "활동 이력이 없네요" "댓글 알바예요?" "운영진한테 신고하면 강퇴될 수 있어요" 같은 내용이었다. 그는 "신상이 털리고 감시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학원·맛집·부동산 정보를 계속 이용하기 위해 '그래, 졌다'는 심정으로 글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느 카페건 운영진이나 회원 등급이 높은 이들의 목소리가 크고, 단순 이용자들은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적 편향성 때문에 불만이 있어도 대부분 꾹 참는다. 상당수가 취미나 생활정보 같은 일상(日常)과 결합된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미시적 사상 검열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꽤나 광범위하게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에만 1000만개(2016년 기준) 넘는 카페가 있고, '다음'도 비슷한 수준으로 추정된다.
뉴스 소비가 소셜미디어 위주로 바뀌면서, 무엇이 제대로 된 진실인지 판단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기존 미디어 보도가 마음에 안 들면 '가짜뉴스' '기레기'라 매도하는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유튜브에는 "4·15 총선 개표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주장, 트위터·페이스북에는 "윤미향 욕하면 매국노" "힘내세요 조국" 같은 주장이 넘쳐난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양의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현대인의 뇌는 팩트(fact)에 대한 분별력이 점점 무뎌지고 있다.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는 진실과 거짓에 대한 분별이 사라진 세계를 우화적으로 그렸다. 소설 속 '진실부'(Ministry of Truth)는 신문·공문서에 실린 경제 수치나 날씨 같은 팩트를 고쳐 쓰며, 현재에 맞춰 과거를 끊임없이 수정하는 기관이다. 스탈린 치하 소련 사회를 풍자한 이 소설에서 벌어진 일은 70년 뒤 한국 현실에도 대입된다. 최근 정부·여당은 압도적 총선 승리를 바탕으로 5년 전 대법원에서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2년 형이 확정된 한명숙 전 총리의 판결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도 현대사 파트의 상당 부분이 바뀌었다고 한다. 지상파TV 등을 동원해 '4·3' '여순사건' 등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바꾸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인터넷 카페와 소셜미디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미시적 검열에 이어, 국가 차원의 검열과 수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1984'의 세계를 지배하는 당의 슬로건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이다. 이는 '적폐 청산'을 내걸고 등장해 과거를 향해 칼자루를 휘두르는 현 정부·여당의 작동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를 위해선 진실이 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지지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닥치고 조국' '닥치고 윤미향' 같은 슬로건도 필요할 것이다.
[신동흔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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