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가톨릭대학교 전경 /사진=광주가톨릭대학교 홈페이지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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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효 아키텍트-37] 김원은 4년간 에너지를 쏟아부은 전남 나주의 광주가톨릭대학교(1992)에 대해 자신의 모든 생각이 집약된 작품이라고 자평한다. 격자(grid) 형식에 의한 대지의 분할과, 그에 따른 모듈화된 배치로, 보다 규격화되고 단순한 형태를 갖도록 했다. 격자 15개에 10개의 건물과 3개의 광장이 할당되었다. 이것은 캠퍼스 계획에서 요구되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건축평론가 임석재는 이 캠퍼스를 '환원과 포괄'이라고 정의한다. "중세로 치면 수도원을 옮겨놓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수도원의 특징으로, 사각형을 기본 모듈 단위로 한 강한 정형적 질서, 성당을 초점으로 한 중심구도이다. 즉 종교 공간으로 규정한다.
모든 교내활동의 중심이 되는 성당은, 하나의 상징적 공간이며 학생 생활의 중심에 있어, 전체 배치의 정점을 이루며, 각 건물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성당 전면에는 전정 광장이 있고, 후면에 클로이스터(cloister·회랑) 광장이 있으며, 측면으로 옥외 집회 및 전례행사를 할 수 있는 스타디움 광장이 마련되어, 성당을 중심으로 모든 광장에서 각 건물에 진입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성당은 평면상으로는 육각형이지만 입체상으로는 마름모로 느껴진다. 정육면체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아래쪽 꼭짓점을 땅에 박아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기숙사는 평면 계획에 있어서 모든 방은 남향 배치를 원칙으로, 조망을 살리면서, 최대한의 태양광을 받아들이게 하고 계단, 화장실, 세탁실, 목욕탕 등은 북쪽에 배치해 쾌적한 개인생활 공간이 되도록 했다. 기숙사는 각 방이 좁고(2. 25m, 애초에는 1.8m) 긴 형태를 취해 제한되지만 다양한 공간 체험과 사용상의 융통성이 가능하도록 했다.
김원은 건축가 승효상과의 대화에서 "세상이 만들어진 질서. 신이 만든 질서 같은 것. 건축에도 뭐 그런 게 있지 않을까? 그런 걸 찾아서 재현해보고자 했다"면서 그중 하나로 그리드(grid)를 든다. 아울러 덧붙인다. "36m 그리드, "36m×36m는 400평. 계산하기도 쉽고. 전체의 질서를 잡는 도구이다."
건축물은 거칠게 시공된 노출콘크리트의 입구 광장, 테니스장이 있는 구획된 운동장을 거쳐 밝은 빛이 쏟아지는 강의 시설, 개폐할 수 있는 돔이 있는 도서관, 기다란 지하통로를 거치는 동굴 묵상실, 수도자를 위한 기숙사 방, 강렬한 모습의 대성당, 심플한 체육관과 아기자기한 학생회관, 수녀원, 예과 학생들의 거주처인 영성관, 대학의 모든 시설을 조망할 수 있는 주교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부 평가는 "대단히 낙천적이며 너무도 자유롭다"이다. 구체적으로는 '각 건물들이 다 다른 사람이 설계한 것 같다'는 평에 대해 김원은 "각 건물들의 프로그램도 다 다르고 해서 각자 성격이 잘 드러나는 게 중요하다"고 답한다.
이 건축을 만든 김원의 사유의 흔적은 무엇인가? 그의 즉설적인 답은 이렇다. "사람들은 건축 같은 것을 생각지도 않는다(마르셀 브로이어). 그저 하나의 풍경이나 디테일로만 여긴다. 즉 건축을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건축가 김원은 브로이어의 언급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저항이었으나 이제는 그 말 자체를 긍정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승효상은 이 건축물 앞에서 건축가 김원을 평한다. "그는 이제는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자유로운 낭만주의자요, 미니멀리스트가 결단코 아니라 오히려 낙천주의자이다."
대한성공회 제3대 마크 트롤로프(Mark N. Trollope) 주교는 1917년 영국건 축가 아서 딕슨(Arthur S. Dixon)에게 서울주교좌 성당 설계를 의뢰했다. 1922년 9월 공사가 시작되었다. 건물의 높은 부분은 서양 기와를, 낮은 부분에는 한국 전통 기와를 얹었다. 창문도 한옥 창호 디자인을 적용했다. 공사비 부족으로 주교좌성당은 1926년 5월 미완성인 채로 공사를 마무리했다. 십자가 평면으로 설계된 성당은 날개 부분을 완성하지 못한 채, 일(一) 자 모양으로 공사가 끝났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사진=wikipe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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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대한성공회 100주년을 앞두고 주교좌성당의 증축이 결정되었다. 김원은 1929년 사망한 아서 딕슨의 설계도면을 영국 버밍엄 도서관에서 찾아냈다.
"설계도를 펼쳐보니 도면을 자른 표시(원래 창이었으나 중도 마무리 때문에 벽으로 변경)가 있더라. 그 표시가 마치 후배 건축가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완성해달라'는 것 같았다."
당시의 건축 재료인 벽돌은 노(老)수녀가 강화도에서 가져오는 걸 봤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강화도 공장 터 흙으로 벽돌을 만들었다. 화강암 또한 정으로 다듬는 곳이 없어 중국에서 돌을 다듬어 실어왔다. 1994년 5월 공사를 시작한 주교좌성당은 1996년 5월 2일 완공 축성 미사를 가졌다. 공사 중단 70년 만에 아서 딕슨의 설계도대로 장십자형(Latin cross)성당을 완성한 것이다. 김원은 앞서 1990년 한옥 대문이 특징인 성공회 성가수녀회 성당, 피정 센터 등을 설계했다.
영성의 집 /사진=전교가르멜 수녀회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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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사직동 언덕배기 주택가, 평범한 주택으로 보이는 곳에 '영성의 집'(2003년)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전교가르멜 수녀회의 도심 수도원이자 전교 전진 기지이다. 흰 종탑은 군더더기 살점을 모두 발라낸 뼈대 같은 인상이다. 3층 건물이 두 채로 나뉘어 ㄱ자로 놓이면서 정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통유리로 트여 있는 1층 로비 공간은 바로 계단으로 이어진다. 지하층에는 소강당과 식당·성당이, 지상층에는 상담실·피정을 위한 방을 들였다. 건물 규모가 큰 것(지하 2층~지상 3층으로 총건평 340평)은 수도회에서 이뤄지는 각종 프로그램 운용 때문이다.
본래 단독주택이 있던 180여 평 좁은 터를 활용해야 했고 이곳이 인왕산 자락 자연경관지구인 까닭에 높이를 12m 이상 올릴 수 없어 지하층 활용은 고육지책일 수밖에 없었다. 설계자는 지하층 중간에 둥그런 정원을 내서 빛이 들어오도록 꾸몄다. 성당 문을 열면 십자가가 신자들보다 더 낮은 곳에 걸려 있다. 제단은 반구형 작은 광장 형태의 중심에 놓였고, 회중석은 계단형으로 설계되었다.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2004)은 한국화가 일랑 이종상과의 협업이 돋보인다. 이화여대 경영대학관(신세계홀, 2005)은 김원과 초등학교 동창인 이명희 신세계 부회장의 기부로 지어졌다. 삼각형 박공 지붕, 외장은 화강석이라는 조건이 주어졌을 뿐이다.
젊은 시절 열정을 쏟았던 '한국의 고건축'은 2012년 열화당의 도움으로 복간됐다. 건축가 김원은 무차별적 진행된 개발논리, 본질을 상실한 과장 일색의 형태주의, 유아적인 전통 계승의 방법론을 질타했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광화문 시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앞으로 50년 뒤 세계적인 명소가 되려면 과감히 전체를 비워내고 차 없는 지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리랜서 효효]
※참고자료=인터넷 웹사이트 www.kimwona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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