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 우주의 신호 관찰하고 토론하며 합의하는 ‘민주주의 여정’ 담아
중력의 키스
해리 콜린스 지음, 전대호 옮김/글항아리사이언스·3만2000원
거대 질량의 두 블랙홀이 충돌하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영상. 2015년 9월 미국 라이고(LIGO) 중력파 관측소 두 곳에서 동시에 포착된 중력파 신호는 이처럼 두 블랙홀이 서로 마주보며 회전하다 가까워져 충돌할 때 생성된 것으로 규명됐다. 라이고 과학협력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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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호수에 작은 돌멩이가 파문을 일으키고 물결은 동심원을 그리며 퍼진다.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중력파를 설명하는 오래된 비유다. 우주 거대 천체의 중력 격동 사건이 그런 중력파를 지구에도 전해줄 것이다. 하지만 중력파는 이론적 존재일 뿐이었다. 100년 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당연한 존재였지만 직접 관측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중력파의 실체는 2015년 9월14일 이후에 점차 확연해졌다. 우주에서 오는 신호를 포착하려는 미국 라이고(LIGO) 중력파 관측소에서 이날 독특한 신호 하나가 연구자들에게 ‘알람’을 울려댔다. 연구자 1000여 명이 참여하는 라이고 과학협력단에서 다섯 달 간의 분석과 논의를 거쳐 2016년 2월에야 공개된 그 신호는 지구에서 13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두 블랙홀의 충돌로 생긴 중력장의 물결, 또는 시공간의 출렁임임이 분명해졌다. 우주를 보는 새로운 창인 중력파 천문학 시대를 열어주는 ‘중력파의 입맞춤’이었다. 50년에 걸친 중력파 연구에 찾아온 환호의 클라이맥스였다.
중력파 첫 검출이 발표된 지 4년이 훌쩍 넘었지만, 한 사회학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당시 중력파 연구자들의 과학활동이 다시 그날 현장의 감동으로 시간을 돌려놓는다. 1970년대부터 중력파 과학활동을 추적해온 영국 과학사회학자 해리 콜린스 교수(카디프대학)의 새 책 <중력의 키스>는 당시 라이고 연구자공동체 안에서 주고받은 수많은 이메일을 바탕으로 역사적인 현장을 실시간으로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라이고 과학협력단에 속해 중력파 연구활동을 안에서 관찰한 유일한 비과학자였다.
2019년 4월25일 관찰한 별 합병에 대한 시뮬레이션 이미지. 출처 라이고(LIGO) 과학협력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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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첫 신호 포착에서 2016년 2월 발견 선언까지 다섯 달 동안 라이고 연구자공동체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무려 1000명 넘는 세계 각지 연구자들 간에 역사적 발견을 검증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있었다. 책은 현장 연구자들의 흥분, 혼란, 의심, 갈등, 인내 그리고 환호의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담아냈다.
이 책이 ‘실시간 기록’이라는 점이 먼저 눈에 띈다. 콜린스는 2015년 9월14일 라이고 관측소에 예사롭지 않은 신호가 포착돼 연구자들 사이에 놀라움과 설렘이 막 일기 시작하던 때 일찌감치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한다. 신호 포착 직후인 9월17일이었다. 이후 0.15초의 이 작은 신호를 두고 갖가지 일들이 벌어지던 다섯 달 동안 이 책의 대부분을 썼다. 상황이 끝난 뒤에 되짚어 성공의 이야기를 쓰는 식이 아니라, 물거품이 될 수도 있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하루하루의 연구 도정에서 연구자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우여곡절, 일진일퇴, 갑론을박의 과학실행 현장을 기록했다.
기자회견과 의회 청문회. 라이고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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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만7000통에 달하는 이메일과 원격회의 기록이 이야기의 토대가 됐다. 실제로 책에서는 당시에 연구자들 사이에서 오간 많은 이메일을 읽을 수 있다. 포착한 신호가 정녕 그토록 기다린 중력파인가 하는 놀라움부터, 누군가 집어넣은 가짜 신호라면 어쩌나 하는 마음졸임까지, 결말을 모르는 설렘과 불안의 교차는 이런 실시간 기록이 아니고선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순조로운 연구 여정만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엄청난 발견임이 분명해지면서 연구자들 사이에 은근히 경쟁도 생겨나고, 불확실한 해석과 토론이 이어지면서 일부에선 까칠한 장면도 드러났다. 논문 초고를 1000명 넘는 연구자들이 돌려보며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는 합의 절차의 피로도 엿보인다.
전 세계 신문의 1면들. 라이고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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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14장으로 이뤄진 두툼한 책은 예사롭지 않은 신호를 포착한 순간을 알리는 첫 이메일로 시작하는 제1장부터, 공동체에서 ‘GW150914’라는 이름을 짓고, 계산과 이론을 총동원해 중력파를 만들어낸 저 먼 우주의 파원을 추적하고, 그리하여 외부에는 비밀을 유지한 채 마침내 과학 논문을 작성하고 떠들썩한 기자회견을 여는 장면의 제11장까지, 중력파 발견의 여정을 세밀히 묘사한다. 이야기꾼 콜린스한테서는 중력파 과학협력단에 속한 내부자의 목소리와 사회학자라는 외부자의 목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다.
저자는 “과학에 간단한 게 없다”는 걸 철저하게 보여줄 생각인 듯하다. 9월14일의 신호가 중력파임을 검증하고 확인하기까지는 갖가지 의심 또는 의문을 하나씩 제거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예행연습을 꾀해 극소수만이 아는 가짜 신호를 심는 이른바 ‘암맹주입’ 비밀작전에 이미 두 차례나 감쪽같이 속았던 연구자들은 그 신호가 우주에서 온 진짜 신호임을 먼저 확인해야 했다. 아니면 누군가 악의적인 신호를 집어넣은 건 아닐까?
블랙홀과 천체 융합 장면 시뮬레이션 영상. 출처 라이고(LIGO) 과학협력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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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의심은 혼란을 키웠지만, 곧이어 검증과 확인, 입증 문제가 중심이 됐다. 0.15초의 짧은 신호를 어떻게 다른 잡음이 아니라 13억 광년 거리를 날아온 중력파로 확정할 수 있을까? 이게 진짜 중력파라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천체 충돌 사건을 생각할 때 성능은 낮았더라도 이전 관측장비에서도 이런 신호가 잡혔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이걸 다 어떻게 설명하고 입증할 것인가? 불확실성 앞에서 모든 걸 의심하고 확인하라, 이는 역사적인 중력파 발견을 앞두고 연구자들이 거칠 수밖에 없던 치열한 과정이었다.
이 책은 전에 아무도 경험한 적 없는 중력파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과학자들은 어떻게 합리적인 합의에 도달하고 논란을 종결하는가, 과학의 신뢰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같은 근본 물음을 던지며 이에 답하는 콜린스의 오랜 사유와 탐구를 담은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실시간의 발견 과정을 읽으면서, 동시에 저명한 과학사회학자인 저자가 관심을 기울여온 과학과 전문가, 논쟁과 의사결정, 민주주의의 화두를 중력파 발견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들을 수 있다. 책의 12~14장은 그런 논의로 채워졌다.
그는 책에서 중력파 물리학을 비롯해 다른 과학을 “민주주의의 등대”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의 다른 책인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이음, 2018)에서 강조했듯이 “과학은 민주주의를 위해 중요하다”는 지론을 강조한다.
중력파 물리학과 민주주의? 동떨어진 관계처럼 보이지만, 콜린스는 불확실성에 대처해 끊임없이 답을 찾아 시도하고 오류를 수정하고 증거에 기반해 토론하고 합의하며 상호 신뢰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학의 모습을 민주주의와 겹쳐서 바라본다.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며 진리를 찾는 진실성(integrity)과 그 절차들이야말로 과학이 신뢰받는 비결이자 과학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그에게 믿을 만한 과학의 모형은 ‘진실성을 갖춘 수공업 모형’이다. 반면에 늘 수정하며 합의하며 발전해온 과학의 본성과 달리 절대진리를 내세우는 계시 모형이나 시시콜콜한 사실만을 따지는 엄격한 전문가주의 모형, 소수 영웅을 만드는 보석 왕관 모형은 과학이 따라선 안 될 모형이며 현실 사회의 민주주의와도 거리가 멀다고 비판한다. 이런 지론에서, 그는 중력파 발견이 확실해진 이후 의기양양한 중력파 물리학자들이 실제와 다른 말로 얼버무리며 연구활동의 비밀을 유지하는 모습을 두고는 사실상 ‘기만’이라고 비판하며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 책은 콜린스가 1970년대부터 중력파 연구 활동을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분석한 <중력의 그림자> <중력의 유령> 등에 이어 펴낸 다섯 번째 책이다. 책 번역을 감수한 오정근 국가수리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한국중력파연구협력단 총무간사)은 콜린스의 책들이 중력파 연구의 시작과 끝을 고스란히 담은 중력파 과학 역사의 “실록”이 될 만하다고 평했다. 책 뒤쪽에 첫 중력파 논문의 초고를 비롯해 여러 자료가 함께 실렸다.
오철우 서울과학기술대 강사(과학기술학)
중력파를 검출한 거대 검출장치 라이고. 출처 라이고(LIGO) 과학협력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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