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6·25 전쟁과 급속한 근대화 과정을 겪으며 내밀한 상처와 고통을 가슴 깊이 밀어넣은 채 살아가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중산층 주부인 ‘나’는 세속적이고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남편의 모습에 몸서리를 치면서 스스로도 속물적인 생을 이어가고 있었죠. 어느날 동창들을 만난 ‘나’는 가식적인 무리 속에서 환멸을 느끼게 되고 시내 한복판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일본인들에게 일러주는 한국인 관광 가이드의 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그동안 잊었던 부끄러움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부끄러움 없이 그저 욕망의 고속도로를 내달리기만 하던 1970년대 한국인들에게 작가가 건네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겠죠.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을 쓴 정아은 작가는 10여년 전 어느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먹고살잖아!”라는 말을 들었답니다. 친척 여성 어른이 던진 적대감이 가득한 말을 듣고 밤잠을 못 이루던 그는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자본주의 시초축적을 위해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는 실비아 페데리치의 분석이나, 자본주의의 3대 요소로 여성·자원·식민지를 꼽는 마리아 미즈의 책을 읽으면서 지은이는 ‘노는 여자’라는 누대에 걸친 거짓말의 성립과정을 깨달아 갑니다.
노동사제 프란시스코 판 더르 호프 보에르스마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선언>으로 힘 없는 사람들의 자급자족 경로를 설명합니다. 버림받고 불이익 당해온 사람들이 모욕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그는 열고 있습니다.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자선이 아니라 연대와 정의로 ‘다른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면서요. 그 세계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이 떳떳하고, 떳떳해야 할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일이 적어도 지금보다야 덜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유진 책지성팀장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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