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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내 안의 빛을 알아보는 단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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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16) ‘
재능을 발견하는 재능’의 힘

‘내면의 반짝임’ 지켜낼지 압살할지는 우리의 선택

재능이 내뿜는 밝은 빛을 읽어주는 문학 독자의 힘


한겨레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한 장면. 시인을 꿈꿨으나 재능이 부족해 좌절했던 유치원 교사 리사(왼쪽)는 다섯 살 소년 지미(오른쪽)에게서 시인의 재능을 발견하지만 결국 이별하고 만다.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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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저 사람이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기 이전, 얼마나 많은 재능과 가능성이 그의 삶을 반짝이게 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가 시인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자기 안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는 화가의 재능을 발견했더라면, 그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눈부신 미래가 그의 앞에 펼쳐졌을까. 죽어라 일만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변신>의 그레고르처럼,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빛을 스스로 차단한 채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모른 척한다. 사람들은 너무 일찍 체념한다.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고. 잃어버린 꿈을 되찾고, 표현해본 적 없는 재능의 날개를 펴기에는, 우리가 너무 나이 들고, 재능의 씨앗 또한 말라버렸다고. 하지만 억압된 꿈은 반드시 언젠가는 되돌아온다. 젊은 시절 꿈꾸던 삶의 이상적 이미지는 생이 끝날 때까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더 몸과 마음의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우리는 바로 오늘부터 자기 안의 시인의 목소리를, 화가의 필치를, 음악가의 재능을 끌어내기 시작해야 한다.

예술가를 가르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

늦게 피는 꽃은 더 늦게까지, 더 오래오래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대기만성형 데뷔에는 뜻밖에도 수많은 장점이 있다. 젊은 시절 객기가 넘쳐흘러 흔히 저지르는 실수의 확률이 낮아지고, 재능을 과시하려는 섣부른 욕심을 내지 않게 된다. 문학은 다행히도 그 어떤 자본도 필요로 하지 않는 예술이기에 수많은 작가들이 늦은 나이에 데뷔하여 재능의 꽃을 피웠다. 마치 처음부터 다 자란 채로 무장까지 한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난 아테네 여신처럼 완숙한 상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 작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오직 경험과 상상력이라는 자본만 있다면, 우리 안의 재능은 언제든지 꽃을 피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숨은 재능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재능을 발견하는 또 다른 재능’이 필요하다. 예술가를 가르치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재능이 바로 이것이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를 보면서 나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시인 혹은 예술가의 목소리를 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유치원 교사 리사(매기 질런홀)는 자신이 가르치는 다섯 살 소년 지미에게 천재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한다. 지미는 그것이 시인지도 모른 채 아무 데서나 아름다운 말들을 쓸데없는 혼잣말처럼 쏟아낸다.

리사는 지미가 시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곁에서 시를 받아 적어주고, 언젠가는 지미의 시집을 출간해주고 싶어 한다. 리사에게는 크나큰 좌절의 경험이 있다. 시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재능이 부족함을 알고 있다. 리사는 자신에게 지미 같은 눈부신 재능이 없음에 절망하지만, 틈날 때마다 작문 수업을 들으며 끝없이 시인의 삶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그러나 리사의 꿈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가족들마저 리사가 헛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희망을 꺾어놓는다. 게다가 지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키워주려는 생각이 없다. 아버지의 관심은 오직 돈이고, 지미가 가난한 시인이 되기보다는 능력 있는 직장인이 되어 부족함 없이 살기를 바란다. 리사는 시인이 되기는커녕 독서조차도 권장하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절망감을 느낀다. ‘시인이 되어서 어떻게 먹고살겠냐’는 지미 아버지 같은 사람들의 시선, 온갖 미디어로 끊임없이 소비의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 아이들이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유튜브만 붙들고 있는 세상을 리사는 너무도 벗어나고 싶지만, 천재 소년 지미를 구출해낼 방법이 없다. 시인을 꿈꾸는 엄마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딸과 아들을 보면서 리사는 좌절한다. 다섯 살 지미는 마치 그녀가 처음부터 다시, 후회 없이 보살피고 아낌없이 재능을 키워줘야 할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진 것이 아닐까.

영화는 점점 지미를 통해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려는 리사의 일그러진 욕망을 슬픈 시선으로 비춘다. 그녀의 재능을 누군가 한 사람만 알아주었어도 그녀는 그렇게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지는 않았을 것만 같다. 아무도 그녀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시인의 재능은 부족했지만 시인의 재능을 발굴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재능을 알아보는 재능 또한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리사는 자신과 아무런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아이를 위해 인생을 바칠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리사는 훌륭한 스승의 재능, 가르침의 재능, 재능을 끌어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지미와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순간, 리사는 절규한다. “세상이 너를 지울 거야. 이 세상은 너를 존중하지 않아. 이 세상에 널 위한 자리는 없어.” 이 말을 들으며 나의 마음 한켠이 무너져 내렸다. 이것이 마치 리사 자신을 향한 절망적인 외침인 것 같아서. 재능을 꽃피우기를 포기해버린 리사는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세상이 나를 지울 거야. 이 세상은 나를 존중하지 않아. 이 세상에 날 위한 자리는 없어.

세상이 당신을 지우려 할 때

하지만 우리 안에는 저마다 생이 끝나는 날까지 돌봐주고 보살펴야 할, 저마다의 내면에서 반짝이는 재능이 있다. 그 재능과 열정을 키워주느냐 혹은 압살하느냐는 오직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내 안의 작은 시인’에게 마음의 곁을 내준다는 것은 남들의 시선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나만의 내면세계, 나만의 창조적 작업의 공간을 지켜낸다는 뜻이다. 나는 하루 종일 온갖 감정노동에 시달리다가도 집에 돌아와 책을 읽는 시간, 집에 돌아와 일기 한줄이라도 또박또박 쓰는 시간만큼은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희열에 사로잡힌다. 작가가 아니었어도 나는 글을 쓰는 일을 사랑했을 것이다. 일기든 편지든 이메일이든 문자메시지든 우리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는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단지 사무적인 내용이나 남들의 뒷이야기가 아니라 ‘오직 글로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나의 마음’을 적어보고 싶은 순간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절망과 권태의 시간 속에서 읽기와 쓰기는 나를 굳건히 지켜주었다. 결코 세상의 폭풍우에 지지 말고, 당신만의 작은 사유와 창조의 공간을 만들 수만 있다면. 세상이 결코 당신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리사와 지미가 강제로 이별을 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 지미는 외쳤다. “시가 생각났어요!” 하지만 이제 지미의 속삭임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년의 자그마한 입술에서 무지갯빛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시어(詩語)의 향연을, 이제 아무도 받아 적지 않을 것이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에게도 리사처럼 그의 빛을 알아주는 스승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아무도 그레고르의 빛을 알아주지 않았다. <변신>에서 누이에게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되든 말든 그를 껴안아주는 용기가 있었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런 따스함을 선물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이 지쳐 쓰러져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기 전에. 나는 가끔 ‘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문학에 미쳐 있는 것일까’ 질문해보곤 한다. 내게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많이 안겨주었던 문학을, 왜 나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돌이켜보니, 그것은 ‘내 빛을 알아주는 이’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내 빛을 알아줄 것만 같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고 있는 공간이 바로 소설 속의 세계였다. 문학작품 속에는 그레고르 잠자의 아버지처럼 자식에게 오직 돈을 벌어오기만을 바라는 차갑고 무서운 사람들보다는, 이방인의 친구, 왕따의 연인,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이들을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바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문학의 외면할 수 없는 과제다. 재능을 알아보는 재능이야말로, ‘문학작품의 독자’가 지닌 무시무시한 힘이다. 세상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그 생생한 활기,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지만 발휘하지 못하는 재능,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불러 깨우는 일, 그것이 문학이다. 단 한번 시 한편을 쓰고 그다음 날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시인의 재능, 내 안에서 반짝이는 최고의 목소리를 꺼낼 수 있는 힘, 내 안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재능을 세상에 표현할 수 있는 힘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여전히 남아 있다. 그 힘을 불러 깨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평생 ‘아직 긁지 않은 복권’으로만 살다가 지나간 나날들을 한탄하며 생을 낭비할지도 모른다. 부디 잊지 말았으면. 자기 안의 시인, 자기 안의 화가, 자기 안의 피아니스트를 끌어내는 힘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말들, 결국 내 빛을 알아주는 이들을 찾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잠들지 않는 마력이었음을.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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