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곤 안전성평가연구소 연구전략본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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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하지만 위해하지는 않다.” 지난 살충제 계란 파동이나 생리대 휘발성유기화합물(VOCs) 사건 등에서 보건당국이 국민에게 발표한 내용이다. 계란 속에 들어 있는 살충제는 유해하지만, 계란 자체는 위험하지 않다니?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독성학 분야에서는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화학물질 안전성 평가에서 유해성과 위해성은 명확히 구분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화평법으로 더욱 잘 알려진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에서 유해성은 '화학물질의 독성 등 사람의 건강이나 환경에 좋지 아니한 영향을 미치는 화학물질 고유 성질'이라고 규정하고 있고, 위해성은 '유해성이 있는 화학물질이 노출되는 경우 사람의 건강이나 환경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정도'라고 구분해 규정하고 있다.
이 정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해성은 화학물질 고유의 성질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고유한 성질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값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화학물질은 각각 고유한 유해성이 존재하며 안전성 평가연구를 통해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수치는 급성 독성, 발암성, 생식독성 등 노출 양상에 따라 무영향관찰용량, 최소영향관찰용량 등으로 불린다.
위해성은 통상 위험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유해성 노출이라는 상황이 추가된 것이다. 유해성과는 달리 위해성은 고유의 값이 존재하지 않으며 노출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를 수 있다. 유해성이 높은 물질이라도 사람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면 이 물질의 위해성은 낮은 것이다. 반면 어떤 물질은 유해성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사람에게 많은 양이 거의 매일 일상적으로 노출된다면 높은 위해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원료물질로 만든 제품이 있다고 하자. 이 원료물질은 고유한 독성 값을 가지고 있지만, 이 원료물질로 만든 제품이 무엇이냐에 따라 제품 자체의 위해성은 다르게 나타난다. 그 제품은 사람이 섭취하는 식품일 수도 있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생활용품일 수도 있으며, 공장에서 사용되는 물질일 수도 있다. 이렇게 유해성은 동일하지만 각 제품의 특성에 따라 위해성은 달리 나타나 해당 제품 규제와 관리는 각각의 위해성 수준에 따라 별도로 마련되는 것이 적절하다.
잘 알려진 내분비 교란 물질인 '비스페놀 A'도 고유한 독성 값을 가지고 있지만, 플라스틱병, 치과 재료, 캔, 영수증 용지 등 제품별로 노출되는 형태가 모두 달라, 각각의 위해성 관리체계는 모두 별도로 수립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를 유해물질의 관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화학물질의 유해성 즉 독성정보 관리는 일원화하고, 위해성 관리는 제품별 혹은 노출되는 양상별로 분리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정부 관계부처의 소관 업무에 따라 유해성과 위해성을 제품별로 통합 관리하는 것이 현실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식품·의약품, 환경부는 일반 화학물질,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약, 산업통상자원부는 공산품, 고용노동부는 작업장 유해물질 등 소관 업무에 따라 유해성과 위해성을 함께 관리하고 있다. 부처별로 이렇게 영역이 나뉜 경우에는 유해성 관리 사각지대가 발생하거나 중복 관리로 인한 비효율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관리체계는 지난 2011년 발생한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주요 원인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했다. 가습기 살균제 원료물질의 흡입독성 정보가 명확히 관리되지 못했고, 이 물질을 제품화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위해성 판단 시에도 유해성 정보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이는 결국 제품 중심의 관리체계에서 물질별 독성정보 제공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 주된 이유로 볼 수 있다.
제대로 된 관리를 위해서는 우선 유해성과 위해성의 관리 주체를 분리해야 한다. 유해성 즉 독성은 특정 물질의 성질을 밝혀내는 것으로 이는 과학연구의 영역에 해당하고, 위해성은 노출 양상에 기반해 위험성을 최소화하는 관리·통제의 영역에 해당한다. 물질 유해성 정보의 관리·생산은 제품이 아닌 물질 중심으로 일원화하고, 이렇게 관리·생산된 독성정보는 제품 사용 관리체계와 규제기준을 수립하는 근거로 이 둘을 명확히 분리해 관리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이후 정부는 살생물제 관리법 등 개별 제품에 규제와 관리를 지속해서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이 원료물질의 독성 부분을 통합해 일원화하지 않고서는 현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개선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은 국립 독성 프로그램(NTP)이라는 통합 프로젝트를 활용해 다양한 요소에 대한 유해성 연구를 실시하고 있고, 독일은 아예 관련 업무를 연방위해평가원으로 일원화했다. 우리나라 역시 부처별로 제각기 관리되는 독성정보를 통합적으로 생산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범정부적 독성연구 및 관리 시스템이 조속히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남주곤 안전성평가연구소 연구전략본부장 jknam@kitox.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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