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간 무역분쟁 우려가 고조되면서 국내 기업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 ‘탈(脫)중국’ 경제 블록을 구축하자고 제안한 가운데 중국이 "미국이 역사를 거슬러 ‘신냉전(new cold war)’ 시대를 만들려고 한다"며 반기를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온 국내 기업들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두 국가의 갈등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美 탈중국 공급망 제안…기업 "양자택일 어려워"
최근 미국은 우방국을 중심으로 산업 공급망을 재편하는 ‘경제번영 네트워크(EPN·Economic Prosperity Network)’를 만들고 한국의 참여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키스 크라크 미 국무부 경제 차관은 지난 22일 "우리는 미국, 한국 등 국가들의 단합을 위한 EPN 구상을 논의했다"며 중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경제 블록 결성에 참여해달라고 제안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잠잠해지는 듯했던 미·중 무역전쟁이 최근 다시 고조되는 분위기다. 사진은 지난해 6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만나 인사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외교부는 "아직 공식 요청은 없는 상태"라고 일축했지만, 수십년간 미국과 중국 시장을 개척하고 생산기지를 세운 국내 기업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이미 지난해 1차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한 글로벌 경기 침체와 그에 따른 수출 감소, 관세 폭탄, 환율 불안 등의 타격을 받은 바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만 지나가면 글로벌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미·중 무역전쟁이 심화되면 기업들의 어려움도 커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과 중국 간 교류가 감소하면서 중국의 석유화학, 철강, 항공 수요도 줄어 관련 국내 업계의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지난해 미·중 무역분쟁으로 물동량 감소를 겪은 해운업계도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실제 지난 1분기 미국의 대중국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5.4% 감소했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과 중국 간 무역이 활발해야 석유화학이 사용되는 가전제품, 의류, 플라스틱 등의 판매가 증가하는데 미·중 무역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어 올해도 소비 심리가 위축될까 걱정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양자택일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전체 수출액에서 중국과 미국이 차지한 비중은 각각 25.1%, 13.4%에 달했다. 양국 모두 한국의 주요 수출 시장이자 생산기지로 자리매김했다.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005930)만 해도 중국에 반도체·가전 공장 4개, 미국에 공장 2개를 운영 중이다. 이밖에 현대차(005380), LG전자(066570), 롯데케미칼(011170), SK이노베이션(096770)등 국내 주요 반도체·자동차·석유화학 기업들도 미국과 중국에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다.
현대차 미국 앨라배마 공장. /현대차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일부 기업들은 미국의 반(反)중 압박이 ‘제2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태’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2017년 사드 사태 당시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면세점·관광 업계가 고초를 겪고 문화 콘텐츠 수출도 위축됐다. 한국이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에 합류할 경우 중국이 2017년보다 더한 수준의 보복을 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韓 기업 공급망 다변화 불가피
미·중 무역분쟁이 장기화되고 전 세계적으로 자국 우선주의가 고개를 들면서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전략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타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공급망을 재편하고 시장 다변화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미 중국에 진출해 공장을 지은 기업이 막대한 비용과 중국의 보복을 감수하면서 철수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대신 미국의 압박 수위가 높아지면 신규 투자나 증설 등은 미국을 중심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으로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는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에 최근 미국에 공장을 신설하기로 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 수출 중심의 한국 기업들이 14억 인구의 거대한 중국 시장을 외면할 이유는 전혀 없다"면서도 "다만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 추세에 발맞춰 국내 기업들도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현지 완결형 공급망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가치사슬 재배치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 기업은 중국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미국으로 수출해왔는데, 앞으로 기업들이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한다는 설명이다. 북미, 유럽, 아시아 등 주요 시장을 중심으로 현지 공급망을 만들면 전염병이나 미·중 무역분쟁 같은 외부 요인의 영향으로 부품 조달이나 생산에 차질이 생기는 문제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실제 오는 7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대체하는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이 발효되면 북미 지역 자동차 소재·부품 공급망이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USMCA 협정에 따라 관세 혜택을 받으려는 완성차 기업은 자동차 생산과정에서 필요한 주요 소재부품을 북미, 특히 미국에서 더 많이 조달해야 한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국내 완성차 업계도 이를 염두에 두고 신규 투자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윤 교수는 "미·중 무역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결국 기업들이 미국으로부터 한쪽을 택하라는 요구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어느 한쪽을 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가 중장기 좌표를 설정해 기업들의 G2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은 기자(jaeeunlee@chosunbiz.com)
<저작권자 ⓒ ChosunBiz.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