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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의 마켓워치]<7>ECB 양적완화와 그 적(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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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으로 돌아선 라가르드 "유로존 경제 8~12% 위축"

4일 회의서 `팬데믹 자산매입(PEPP)` 규모 확대 기대

PEPP 가동 두달, 약속과 달리 `캐피탈 키` 못 벗어나

獨헌재 판결, 각국 이해충돌로 독자적 운용 힘들어

제한적 자산매입, 재정당국 압박…시장과 갈등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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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유럽중앙은행(ECB)의 물가 목표치를 크게 하회하고 있다.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코로나19 확산 이후 유럽중앙은행(ECB)은 경제에 대해 관대한 시나리오를 제시했지만, 이제 그 유효기간이 끝난 것 같습니다. 장담하긴 매우 어렵지만, 이대로라면 올해 유로존 경제는 전년대비 8~12% 정도 위축될 것 같습니다. 이는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두 배나 더 큰 수준이며 유로존 출범 이후 최악의 성적일 겁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한 강연에서 유로존 경제에 대해 이처럼 비관적인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엇박자를 내고 있는 유로존 각국 재정당국을 압박하는 의도가 컸겠지만, 라가르드 총재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유로존을 쳐다보고 있는 모두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ECB의 추가부양조치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사실 ECB는 코로나19 충격에 맞서 지난 3월18일 7500억유로 규모의 `팬데믹 긴급자산매입 프로그램(PEPP)`을 가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보름쯤 후인 4월30일에 열린 통화정책회의에서는 시장 기대와 달리 PEPP 규모를 유지했습니다. PEPP는 가동하자마자 총 7500억유로 중 2340억유로를 자산매입에 써 버렸고, 그래서 이 속도대로라면 10월쯤 실탄이 모두 소진되는데도 말입니다. 연말 이전에 경제지표나 기업활동이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할지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니 PEPP 확대 요구는 불가피해 보입니다.

ECB가 4일 열리는 통화정책회의에서는 PEPP 규모를 늘릴 것 같습니다. ECB 고위층에서도 PEPP 규모 확대 가능성을 흘리고 있습니다.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인 프랑수아 빌레 드 갈루 ECB 정책위원은 “PEPP 규모를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확대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했고, 라가르드 총재 스스로도 “만약 필요한 상황이 된다면 PEPP 규모나 보유채권의 잔존만기, 매입 채권 비중 등을 조정하는데 망설이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ECB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나 일본은행(BOJ)처럼 PEPP를 `무제한(Open-ended)`으로 늘릴 수 있을까요.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PEPP 가동 이후 자산매입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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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국가별 ECB내 출자비율과 PEPP 자산매입 비율




사실 라가르드 총재는 PEPP가 종전의 `공공자산매입 프로그램(PSPP)`에 비해 유연성을 가질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동안 ECB는 자산을 매입할 때 ECB에 자본금을 낸 국가들의 출자비율에 따라 자산을 사줬습니다. 이른바 `캐피탈 키(Capital Key)` 방식이었습니다. PEPP의 유연성이란, 이 캐피탈 키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실질적으로 지원이 필요한 국가 채권을 더 사주겠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ECB는 실제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전 ECB는 지난 3월20일부터 5월20일까지 두 달간 PEPP가 매입한 자산 내역을 공개했는데요, 그 결과 ECB가 여전히 캐피탈 키에 신경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 중 ECB는 PEPP를 통해 ECB 출자지분이 17%인 이탈리아 국채와 회사채, 기업어음(CP) 등을 21.6% 매입했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가장 많았고 그로 인해 가장 가파르게 국채금리가 뛴 이탈리아 채권을 집중적으로 매입하지 않았다는 게 의외였습니다. 이를 두고 많은 시장참가자들은 `ECB가 여전히 캐피탈 키를 염두에 두고 있구나`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또 하나 의외였던 점은, ECB가 출자비율이 20%에 이르는 프랑스 채권을 고작 14% 정도 매입하는데 그쳤다는 겁니다. 반면 채권시장이 그다지 불안하지도 않았던 독일 채권을 27% 이상 샀습니다. 이는 독일의 ECB 출자비율 26%를 웃도는 수준입니다. 아울러 이 PEPP와 투트랙으로 움직이는 기존 PSPP도 변화를 보입니다. 이 두 달 간 PSPP는 이탈리아 채권 매입을 크게 늘렸습니다. 반대로 독일 채권 매입은 크게 줄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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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B PSPP의 기간별, 국가별 자산매입 비율




두 종류의 자산매입 프로그램을 굴리는 ECB는 대체 왜 이런 행보를 보였을까요. 공식적인 답변은 없었지만, 지난달초 ECB의 PSPP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선 독일 헌법재판소 판결 영향이 큰 듯합니다. 당시 독일 헌재는 “PSPP는 국가재정 위험을 초래하고 민간저축에 손실을 가져와 납세자의 돈을 위태롭게 하고 생존이 불가능한 기업을 유지시킨다”고 지적하면서 석 달 내에 ECB가 필요성을 입증할 수 있다면 이를 유지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습니다.

지난 2014년부터 매입을 시작한 PSPP는 지금까지 총 2조2000억유로의 채권을 사들였습니다. 캐피탈 키 원칙이 적용되는 PSPP다보니 ECB 출자비율이 가장 높은 독일 국채 매입비중이 가장 높았을 겁니다. 이 부담 때문에 ECB는 종전 PSPP에서의 독일 채권 매입을 크게 줄이는 대신, 헌재 판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PEPP에서의 매입을 늘린 겁니다.

한편 독일 국채와의 금리 차이(=스프레드)가 가장 크게 벌어졌던 이탈리아 국채를 PEPP로 대거 사들이려 했지만, 대규모 재정부양책으로 인해 국채금리 상승이 뛸까 우려한 네덜란드와 스페인 등이 `왜 우리 채권은 더 사주지 않느냐`며 아우성을 치니 ECB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캐피탈 키 원칙을 벗어나는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ECB는 PSPP를 통해 이탈리아 채권을 대거 매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ECB는 유로존 국가 모두를 위한 중앙은행이다보니 19개 회원국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 헌재 판결에 구속될 수밖에 없고, 각국 요구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ECB 입장에서는 쉽사리 무제한 PEPP라는 파격적 카드를 꺼내들기 힘든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아울러 유럽연합(EU)이 공동으로 준비하고 있는 `유럽 회복기금(EU Recovery Fund)` 합의를 압박하기 위해 PEPP에 제한적으로만 써야 한다는 게 라가르드 총재의 생각입니다. 유럽 회복기금은 PEPP와 동일한 7500억유로 규모로 각국이 공동으로 조성하는 것으로, EU 집행위원회가 높은 신용등급으로 싸게 돈을 빌려 회원국들에게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문제는 이 7500억유로를 어떻게 지원하느냐에 따라 국가간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재정 건전성이 높은 북유럽 국가들은 지원금을 상환하도록 해야 하니 대출 방식을 쓰자고 하고, 반대로 재정이 취약한 남유럽 국가들은 2500억유로는 대출로 하되 5000억유로까지는 보조금으로 지원하자고 맞서고 있습니다. 27개 회원국이 모두 동의해야 하고 유럽의회 비준까지 통과해야 하니 갈 길이 멉니다. 용케 합의한다해도 출범은 2021년쯤으로 예상됩니다.

그동안 라가르드 총재는 기회가 될 때마다 “ECB 통화정책만으로 유럽 경제를 살릴 순 없다”며 재정당국의 역할을 수없이 강조해 왔습니다. 무제한 PEPP가 각국 정부의 재정부양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2021년 유럽 회복기금이 출범하기 전까지만 PEPP는 브릿지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입니다.

라가르드 총재도 이번 코로나19에 맞서 PEPP를 새롭게 만들고 이를 통해 역사상 처음으로 CP는 물론이고 `추락천사(Fallen Angel·코로나19로 인해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기업)` 회사채까지 매입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유로존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하겠다(whatever it takes)”고 공언하던 전임자 마리오 드라기 전 총재를 그리워하는 시장은 또다시 라가르드 총재의 PEPP 규모 확대에 실망감을 표시할지 모릅니다. 시장과 ECB, 각국 재정당국, 이 삼자 간 힘 겨루기가 어떻게 이어질 지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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