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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이굴기의 꽃산 꽃글]오대산 적멸보궁 앞의 구슬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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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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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대해 궁리해본다. 신체발부 중에서 가장 상부에 속하는 귀는 어쩐지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세수할 때도 그것만 쏙 빼놓고 씻지 않는가. 귀는 누가 몰래 내 생각을 한 삽 푹 뜬 뒤 자루만 달랑 빼들고 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뜨거운 냄비를 들다 앗, 뜨거울 때 찾는 건 귀. 몸에서 손가락보다 더 먼 변방, 가장 추운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노자나 공자를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소홀히 대접해야 할 귀가 아니다.

오대산 오르는 길. 우리 사는 세상 쪽으로 나와 궁금한 눈길로 두리번거리는 야생화들이 많다. 이맘때면 거의 모든 등산로에서 눈 밝은 이들의 발길을 붙드는 건 초롱꽃, 노루오줌. 이름이 좀 사나워도 서슴없이 얼굴을 들이대면 향기 혹은 털이 코를 찌른다. 어느 돌계단 옆에선 그 귀한 청닭의난초가 있어 일순 내 꽃동무들을 불러 모아 엎드리게 했다.

낭랑한 독경 소리 울려나오는 석등을 짚어가며 도착한 적멸보궁. 날렵한 처마 아래 현판이 늠름하다. 저 적멸은 전혀 모르지는 않겠는데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다. 한자도 어렵지만 한글도 참 어렵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는 그냥 굳이 따질 필요가 없겠다. 적멸이 어디에 있는지 똑똑히는 모르겠으나 이 깊은 산중에서 읽고 중얼거리면 그 어떤 말 못할 느낌 속으로 나를 운반해 주시는 듯!

마당 한편의 나무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의 한 자락을 더듬다가 오대산의 골짜기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것을 겨우 수습했다. 세 번 절하고 물러나오다가 엉뚱한 곳에서 무릎을 꿇고 또 엎드려야 했다. 적멸보궁을 받드는 계단 옆 봉긋한 둔덕에 구슬붕이가 한껏 피어 있지 않겠는가. 가장 낮은 곳에서 피는 야생화 중의 하나인 구슬붕이는 참 오밀조밀한 구조이다. 땅에 누가 푹 꽂아놓은 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꽃. 무덤가에서 흔히 보았는데 오늘 여기에서 보는 꽃은 여간 예사롭지 않았다. 하늘까지 배경으로 넣어 꽃을 찍고 오대산을 짚고 일어났다. 수승한 부처의 뒤를 따른다 해도 부처의 등에 업혀서 갈 수는 없다. 가장 하부의 발자국은 내가 찍어야 한다. 깜쪽같이 사라진 일행의 뒤를 쫓아 비로봉으로 서둘러 헥헥거리며 올라갔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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