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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하태훈의 법과 사회]만사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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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사법 자제’, 가수 조영남씨의 화투 그림 대작(代作) 사기 혐의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확정하면서 사용한 언어다. 사법통치(juristocracy)와 사법 과잉이 지적되고 있는 상황에 시의적절한 원칙 선언이자 경고의 메시지다. 앞으로 끼어야 할 데만 끼겠다는 사법부의 다짐으로 들린다. “미술 작품 거래에서 기망 여부를 판단할 때 위작 여부나 저작권에 대한 다툼이 있지 않은 한 가치 평가는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법 자제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 원칙은 비단 예술이나 문학작품의 표절 시비, 친일 역사 논쟁 등에 한정되지 않아야 한다. 정치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검찰과 사법의 손을 빌리는 형사사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정치의 사법화에 던지는 경고장이어야 한다. 고소장을 들고 검찰청으로 달려가고 어떤 사건이든지 법원의 판단을 받아 보려는 정치권의 욕구를 자제하라는 소리로도 들린다. 민사적 다툼도 형사고소로 해결하려는 국민에게 던진 메시지로 새겨들어야 한다.

경향신문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그동안 사법은 절제가 아니라 과잉이었다. 형사처벌은 최후 수단이어야 하는데 유일한 수단이자 최우선 수단이었다. 자제의 미학은 발휘될 틈이 없었다. 국민 탓이기도 하다. 언론에 기사화되면 곧바로 누런 봉투에 고소장, 고발장을 담아 검찰청으로 달려간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형사처벌 청원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무리 고소권이 형사 절차상의 권리라지만 권리남용에 수사기관과 법원은 몸살 날 지경이다. 형사고소 사건은 매년 증가 추세다. 개인의 권리 주장이 강해지고 경제발전에 따른 재산분쟁이 증가했다지만 당사자끼리 원만히 해결하지 못한 탓이다. 손해를 원상회복시키고 피해자와 화해해 해결해야 할 일이 결국 감정싸움으로 번져 형사고소로 끌고 간다. 2019년 고소 사건 수는 65만건이 넘는다. 그중 절반이 훨씬 넘는 사건이 불기소처분으로 종결되었다. 기소율이 매우 낮다. 가장 큰 문제는 민사사건의 형사화다. 개인 간 채무불이행과 관련된 사기나 횡령, 배임 등의 재산 범죄를 민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고 고소부터 하고 본 결과다. 고소로 합의를 압박하면 돈을 받아내기도 유리하다. 검찰 수사를 민사소송을 위한 증거수집 수단으로 오용하기도 한다. 명예훼손이나 모욕 사건에서도 국가공권력을 사적 감정 해소에 악용한다. 사사로운 다툼, 민사분쟁도 공적 기관인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판단을 받으려 한다. 수사받고 재판받게 해서 괴롭혀야 분이 풀린다. 일종의 분노조절장애다. 화를 못 참고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름없다. 손해를 입으면 억울하기도 하고 당했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하니까 분노와 열패감이 솟아난다. 대체로 내 탓으로 여기지 않는다. 남 탓으로 돌리고 증오와 원한을 품게 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니 상대방이 아무리 얘기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확증 편향을 공적으로 입증해주길 기대하는 마음에 소송으로 가는 것이다.

사회 있는 곳에 법이 있다고 모든 분쟁을 법적으로 해결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법의 지배 위에 사회가 존속하고 공동체가 유지된다는 말은 모든 분쟁을 법정에서, 그것도 형사 법정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법은 선출되지도 않고 견제도 잘 안 받는 권력이지만 국민은 사법에 과잉으로 기댄다. 분쟁의 해결에 수사기관과 법원이 동원되는 것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성숙하지 않은 사회일수록 갈등과 분쟁을 법률가에게 맡기고 형사법적 판단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갈등 조정이 아니라 여전히 복수와 응보의 반문명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정의를 세우고 법이 살아 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대의명분을 찾지만 실은 복수 욕구의 발로다. 형사처벌한다고 피해자의 복수심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고소·고발했으면 검찰과 법원의 판단을 신뢰하고 존중해야 하지만 기댄 만큼 실망과 불신도 크다. 아이러니하게도 판결이 확정되면 새로운 논쟁이 시작된다. 사법에 대한 극단의 비난과 옹호가 갈라진다.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이슈일수록 더 그렇다. 과잉 소송으로 드는 개인과 국가의 시간과 비용도 어마어마하다. 불필요한 사건을 처리하느라 수사와 사법의 본래 기능에 집중할 수도 없다. 그래서 고소 남발을 막고 민사의 형사화를 제어할 장치가 필요하다. 사법 자제의 원칙을 선언하는 것으로 부족하다. 형사처벌 대신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유용한 장치다. 소송 이외의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제도의 활성화도 필요하다. 고소·고발권 행사도 권리남용이면 과감하게 통제해야 한다. 그래야 고소공화국, 사법만능, 그리고 만사법(法)통, 만사형(刑)통이 회자하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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