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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협력업체 유치권 행사 이어질까… 조선업계 '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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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공정거래위원회가 표준하도급계약서에 유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규정을 새로 담은 가운데 조선업계에서 하도급업체가 해양플랜트 시설을 점거하는 ‘1호 사례’가 나왔다. 하도급업체는 합법적으로 원청의 불공정 행위에 대응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됐다는 입장인 반면, 원도급자인 조선소는 유치권 행사 가능성이 대폭 높아짐에 따라 납기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하고 있다.

지난 25일 삼성중공업의 협력업체 TSS-GT는 "약속된 공사대금 20억원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대형 해양플랜트 설비 ‘매드독’을 점거했다. 매드독은 2017년 1월 삼성중공업이 영국 국영석유회사 BP로부터 수주한 1조 5000억원 규모의 부유식 해양생산설비(FPU)다. 삼성중공업은 "업체의 일방적 주장"이라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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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양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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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계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하도급업체가 우리나라 3대 조선소 중 하나인 삼성중공업(010140)을 상대로 유치권 행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삼성중공업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유치권 행사가 벌어진 지난 25일 삼성중공업의 한 관계자는 TSS-GT 측에 "경찰이나 법원에 사전 신고는 했느냐"는 질문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유치권 행사는 집회와 달리 경찰에 사전 신고가 필요 없다.

사실 TSS-GT가 삼성중공업을 상대로 유치권 행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본 계약에 앞서 작성하는 ‘표준하도급계약서’ 덕분이었다. 표준하도급계약서는 원도급자의 불공정 행위를 방지하고 수급사업자가 공정한 계약을 체결하도록 하기 위해 공정위가 마련한 계약서다.

공정위는 지난해 1월 표준하도급계약서 제·개정을 통해 하도급업체가 원도급자로부터 하도급대금을 지급받지 못할 경우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원도급자 소유 물건 등을 대상으로 유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표준하도급계약서에 새로 추가했다. 삼성중공업과 TSS-GT가 작성한 표준하도급계약서가 유치권 행사를 벌인 법적 근거였다.

특히 표준하도급계약서 제·개정에는 평소 건설과 조선업계의 하도급 불공정거래 문제 해결에 관심이 큰 김상조 전 공정거래위원장의 의지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8년 8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 자리에서 "조선업계에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불공정 하도급 관행이 악화해 협력업체에 부담이 전가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신속한 사건처리뿐 아니라 하도급 거래 관행 개선도 노력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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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조 전 공정거래위원장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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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 협력사들은 이번 유치권 행사 사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거제시의 한 조선소 사내협력사 대표는 "여전히 조선업계에는 ‘단가 후려치기’ ‘선공정 후계약’ 등 불공정 거래 관행이 심각하지만, 딱히 항의할 방법도 없어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했다"면서 "그런데 이번 사례를 통해 대형 조선소를 상대로 하도급 업체가 합법적으로 힘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증명됐다"고 말했다.

반면 원도급자인 조선소는 우려하는 분위기다. 유치권 행사 1호 사례가 나온 만큼,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조선소 관계자는 "업계 특성상 선박이나 해양플랜트 인도 전까지는 유동성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면서 "자칫 대금이 밀려 하청이 유치권 행사를 벌일 경우 납기에 차질이 생겨 큰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각에서는 자칫 원도급자가 하도급업체와 표준하도급기본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거나, 유치권 행사 내용을 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했다. 법무법인 강호의 장진영 변호사는 "이번 유치권 행사는 소형 하도급업체가 업계 최초로 삼성중공업의 초대형, 초고가 해양생산설비를 상대로 벌인 일"이라면서 "자칫 조선소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유치권 행사를 막기 위해 표준하도급계약서 작성을 회피할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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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중공업이 거제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1조5000억원 규모의 대형 해양플랜트설비 공사 현장에서 한 하도급업체가 “공사대금 20억원을 못 받았다”며 지난 25일 현장을 점거한 채 유치권 행사에 나서고 있다. /독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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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표준하도급계약서 작성은 법적으로 의무사항이 아니다. 페널티는 없고 인센티브만 있다. 가령 1년간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사용하면 공정위에서 벌점을 경감하고, 조달청은 입찰참가자격 사전심사 평가 때 2점을 가점으로 주는 식이다.

다만 표준하도급계약서 의무화에 대한 업계의 의견은 엇갈린다. 의무화 필요성에 대해 공감은 하지만, 사업체 간의 사적 계약에 대해 정부가 계약서 작성을 강요하는 것은 과하다는 지적이 있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 의무화를 골자로 한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공정위 관계자는 "표준하도급계약서 작성이 의무는 아니지만, 작성하는 업체에 주는 인센티브를 확대하는 등 정부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삼성중공업은 TSS-GT의 유치권 행사가 불법이라는 입장이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도급계약상 대금과 추가공사비 지급을 완료했고, 불법 점거이기 때문에 유치권 성립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TSS-GT를 상대로 법적대응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김우영 기자(young@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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