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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동인문학상] 6월 독회 심사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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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동인문학상 6월 독회 심사평 전문

◇죽은 자를 기리는 것은 슬픔의 기억이라기 보다는 삶의 축제가 된다

김화영·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조선일보 DB


▲정세랑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
소설의 앞에 친절한 도표로 제시한 가계도와 같이, 심시선이라는 여성으로부터 형성된 일종의 모계가족 이야기인 만큼 사실상 페미니즘을 정조준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여타의 많은 페미니즘 소설처럼 드러나게 공격적이거나 비판적이기 보다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을 일상의 바탕 속에 꼭꼭 숨긴 이 여성 공화국 개인들의 교집합, 이해와 화해의 과정, 그 전체의 움직임 속에 감도는 유쾌한 ‘가벼움’이 이 소설의 빼어난 일면이다. 이 유쾌함은 여러 인물들이 공감하는 구심점인 심시선의 삶이 보여준 일종의 정직함, 자유로운 열정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소설은 죽은 자를 기리는 것이 슬픔의 기억이기 보다는 삶의 축제가 되게 한다는 작품의 기조가 읽는 사람의 내면에 환한 빛을 던진다. 상실이 부재 보다는 존재를 드러낸다는 이 작품의 메시지가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임을 말해준다. 이 소설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것은 별것 아닌 삶의 디테일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진실을 향한 정직한 보물찾기다. 오랜만에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깊숙이 숨겨둔 이 소설을 유쾌하게 읽으면서 마치 삶과 슬픔의 정수인 흑요석으로 상감한 풍선같은 것이 이 공기가 잘 통하는 광활한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에 홀리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르트르의 아포리즘, ‘삶은 무용한 정열이다’라는 메시지를 정교하고 통일된 구조 속에 가장 구체적인 일상의 세목들로 보여주는 기량이 놀랍다.

▲강화길의 단편소설집, ‘화이트 호스’
전체적으로 호러 소설의 분위기를 바탕에 깔고 “불확실의 아름다운 고통”을 형상화한 7편의 작품. 특히 처음 4작품, <음복>, <가원>, <손>, <서우>가 돋보인다. 단순한 암시의 차원을 넘어선 과감한 생략법, 비약, 논리적 공백, 어긋난 대화, 동문서답, 인과관계의 혼란, 불확실, 그리고 불안이 지배하는 서술방식과 이야기는 삶과 인간관계의 근원적 불확실성을 함축한 가운데 주로 여성의 사회적 심리적 위상과 예술적 창조의 고통에 의문 가득한 시선을 던진다. 그러나 비약과 생략의 힘을 과시하면서도 독자들에게 조금만 더 친절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나날의 삶에 내재하는 모순들을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한다

김인환·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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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단편소설집 화이트 호스
한국의 가족을 묶고 있는 관계의 여러 국면을 다층적 시각으로 파헤친 심리소설로서 작가는 일하면서 살림하는 여자의 비판적 시각으로 무능한 남자와 집안을 책임지고 주도하는 여자 사이에 개입하는 무의식적 편견들과 은밀한 폭력들, 그리고 가족구조 안에 자기의 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전략들을 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뿐 아니라 현대적인 가족도 강화길의 비판을 피해가지 못한다. 공주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리 없다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는 초점화자들의 현실감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강화길의 소설들은 우리에게 나날의 삶에 내재하는 모순들을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한다.

▲정세랑의 장편 소설 시선으로부터
하와이에서 노동자로 출발하여 독일인 화가를 만나 독일에 가서 화가가 되고 중국과 터키의 피가 섞인 독일인 화상과 결혼하여 한국에 와서 미술평론가가 되고 그가 독일로 돌아간 후에 광고회사를 하는 한국인 사업가와 결혼하여 죽을 때까지 자유롭게 자기를 실현해 온 심시선의 개인사에 그녀가 낳은 아들딸 부부들과 그녀가 낳지 않은 남편의 딸 부부가 사업가로, 파일럿으로, 유물발굴가로, 미술품 복원가로, 곤충학자로 웹 디자이너로, 독서광 주부로 살아가고 다시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업가로, 음악가로, 컨셉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아직 어린 아이들은 산호정원사와 박새연구가를 꿈꾸며 자라나는 가족사가 겹쳐진다. 자유로운 영혼의 전파력이 대를 이어 전달되어 혈연을 넘어 삼대 수십 명의 남녀가 자유로운 영혼의 연대를 형성하며 활동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인물들의 내면을 지배하는 자유의 빛이 민간인 학살의 그늘을 밀어내며 빠른 호흡과 경쾌한 페이스로 세상은 살 만한 것이라고 노래한다.

◇경직된 페미니즘의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은 여성 작가들의 소설

오정희·소설가.
조선일보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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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장편 소설 ‘시선으로부터
젊은 시절, 가족들이 전쟁통에 학살당하는 비극적 가족사를 겪은 후 하와이로 이민, 화가로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 글쓰는 이로 생애를 보낸,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영혼 심시선의 일대기와 그 자손들의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쪽글과 여러 매체에 기고한 산문, 인터뷰, 강연, 주변인물들의 회고를 통해 ‘심시선’ 이라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물을 창조해냅니다.우리가 살아온 지나간 연대의 기록이기도 한 이 소설은 시대와 환경과 고착된 가치관의 억압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살아낸 한 사람의 생애의 기록으로 그가 남긴 가족들의 삶을 통해 자유롭고 존중받는 삶의 정신과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의 의지와 자기존재에의 믿음은 모계적 전통으로 그가 남긴 가족들의 삶을 통해 상당히 유연한 방식으로, 그러나 강렬한 메시지로 전해집니다. 심하게 굴곡진 삶을 살아오면서 자기연민이나 피해자의식에 함몰되지 않은 것, 앞선 세대 신여성 예술가들의 비극성을 넘어서는 방식이 당당하고 건강했습니다. 인종과 직업, 성별과 개별성에 대한 편견없이 폭넓은 수용과 이해로 억압없이 자유로롭고 자율적인 세상을 추구해나가는 ‘심시선’과 그로부터 이어져 퍼져가는 자손들의 모습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긍정과 애정으로 따뜻하고 유쾌하여 우리의 지금 이 자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등장인물만큼 다양한 직업군에 대해서 나름의 깊이와 전문성으로 접근한 것도 이 소설에 대한 신뢰감을 주지만 등장인물 각자를 섬세히 살피고 배려하다보니 잔가지가 너무 많아 큰 줄기를 놓치는 산만함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강화길의 단편소설집 ‘화이트 호스
이 작품집에 실린 7편의 소설들은 소재는 각기 다르지만 주로 화자가 여성들이며 ‘여성의 자리, 여성으로서의 환경’ 이라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현재 이 작가의 지향점이나 문학적 관심사 내지 소명감이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여성에 의하여 쓰여진 여성에 대한, 여성들의 이야기이지만 발표연대의 순으로 섬세히 보면 그 접근방식이 조금씩 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가의 장점이랄 수 있는 여러겹의 층위로 스크린 한 여성과 남성, 권력과 지배, 사랑과 공포를 다루는 방식이 현상적인 것에서 그 근원을 짚어가는 쪽으로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문제접근방식의 진화라고 할지 진일보라고 해야할지 고도의 세련됨이라고 해야 할지 보는 입장에 따라 달리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조는 좀더 복잡해지고 정치적 올바름을 묻는 어조는 신랄해집니다. 소설의 서두에서, 앞뒤없이 툭 내던지는 듯한 어투에, 무슨 이야기이지? 뜬금없다는 느낌인데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 이런 얘기구나 싶게 뒷통수를 치는 얼얼한 느낌과 함께 복잡한 퍼즐이 풀리는 통쾌감을 주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으로 자기안의 모순, 상반된 욕망과 요구를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기에 경직된 페미니즘의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고, 그러한 이유로 독자와 함께 쓰고 읽는 글로서의 힘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의식,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공포를, 태생적이든 환경적이든 학습에 의한 것이든 여성들은 그것을 어떻게 내면화해왔으며 전략화해왔는가를, 여성자신들의 덫으로 만들어왔는가를 중요한 물음으로 우리에게 던지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작가적 행보가 저으기 주목되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뭉개지고 피어나면서 조금씩 바뀌는 가난의 문화

정과리·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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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의 단편소설집 ‘자연사 박물관’
전반적인 느낌
지난 30여년의 한국소설에 널리 퍼진 기술법 중의 하나는 심각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고 제재적 다변화를 통해서 암시의 분말을 퍼뜨려 정서적 동조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사소한 것들의 심각성을 부각시켰던 저 옛날 리얼리즘의 방향과 정반대로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리얼리즘이 근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면, 오늘의 경향은 현실 앞에서의 무기력증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러한 무기력증은 현대인들의 일반적 심리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것 자체가 진실성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그런 만큼 제재 다변화는 시야의 폭과 두께를 넓히고 쌓는 방향으로 기능해야 현실에 대한 복합적인 성찰과 세계관들의 상호 개방을 열 수가 있다. 그러는 대신 한 가지 생각을 고집스럽게 움켜쥐고 있는 상태에서는 다양한 형상들과 문체의 변주들은 요란한 화장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그런 자가 분식이 지나친 원심력을 받게 되면 불필요한 세목들이 끼어들어 줄거리가 너덜너덜해지고, 유명인들의 고유명사를 남발하는 쇼케이스 행사가 되기도 하고, 뻔한 주제를 화려한 소도구들을 동원해 벌이는 낡은 알레고리로 떨어지곤 한다. 어느 방향이든 결국은 서술 능력의 증진을 스스로 포기하는 꼴이 된다. 간단히 비유하자면, 마음 속에 일어나는 분노를 어항 속의 물고기를 손으로 압박해 죽이는 것으로 해소하는 처리 방식은, 애먼 물고기만 억울하게 할 뿐이다. 화성에 가고 싶으면 우주선을 개발하는 게 길이다. 엉뚱한 비유 같지만, 우리 소설에도 일론 머스크가 필요한 때가 온 것 같다.
이수경의 ‘자연사박물관’을 추천함
이수경의 ‘자연사박물관’』은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의 대책없는 몰락을 꼼꼼히 묘사하고 있다. 불행을 야기한 물리적 사실들을 꽤 ‘조직적으로’ 배경에 깔고서, 그로부터 유발된 한 가족의 절박하게 허둥거리는 마음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소위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것이 ‘현실을 열심히 좇다가 보면 필경 현실에 배반당하고 만다’는 힘없는 사람들의 실제 현실을 적확하게 반영하는 것이라, 이보다 더 핍진한 걸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걸핏하면 문제 해결의 전망을 보이라고 억압하는 정치꾼들의 기세야말로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그런 으름장들이 증강현실이라도 되는 양 문학에도 통용되는 게 꽤 오래된 한결같은 세태다(세상이 한참 변해서 이젠 아닌 것 같지만, 진짜 그렇다.) ‘자연사박물관’의 가족들은 그런 압박에도 떠밀려서도 더 한정없이 추락하고 있다. 추락하면서 지면 위에 가난의 풍경을 안쓰럽게도 선명한 홀로그램으로 띄어올린다. 그 풍경 속에서 독자는 간간이 약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 삶을 보듬고 가꾸는 가난의 문화를 편린의 형태로 엿볼 수 있다. 그 가난의 문화는 뭉개지기도 하고 슬그머니 피어나기도 한다. 뭉개지고 피어나면서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바뀐다. 다시 말해 꿈틀거린다. 그것이 이 작품의 심리적 현실 위에 또 하나의 현실을 배접한다. 이 작품의 울림이 꽤 웅숭깊은 것은 그 덕택이다.

◇깊숙한 곳을 은근히 찌르는 문장과 거두절미하고 말하는 문장

구효서· 소설가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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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
“어머니의 제사를 하와이에서 지내자.”며 자식들이 손주들과 의기투합하여 하와이에 가는 이야기다. 어머니가 두 번 결혼했으므로 아버지 다른 형제와 그 아래 조카들까지 인원이 제법 많다. 하와이는 어머니 심시선이 젊어 한 때 살았던 곳이다.
심시선은 어떤 인물인가. 국제적으로도 저명한 미술 평론가인 듯하지만 많이 팔린 것은 그의 산문집이다. 시대의 폭력과 억압 앞에서 순종하지 않았던 심시선이라고는 하는데 시대의 폭력과 억압이라는 것이 전시 민간인 학살과 예술계에 작동하는 권력을 얘기하는 것 같으나 정작 그것과 관련한 심시선의 생애는 잘 잡히지 않는다. 민간인 학살의 전말과 예술계의 권력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방식도 드러나지 않는다. 매 챕터의 도입부를 구성하는 심시선의 구술과 문장은 지나치게 짧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생애를 재구성하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녀의 독자들이나 자손들에게 적지 않은 존경과 더불어 본받을 만하거나 모범이 되는 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이유가 심시선의 사건적 혹은 서사적 생애에 있지 않다는 뜻일까. 그럼 무엇 때문일까. 심시선의 인터뷰, 강연, 저술, 방송, 축사 등의 짧은 인용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생애라기보다는 그녀의 언어요, 그것으로 짐작되는 그녀의 삶의 태도다.
그녀가 남긴 언어들이 언어라서,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때때로 잠언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깊숙한 곳을 은근하면서도 꼼짝 못하게 찌르고 드는 정세랑의 독특한 언사를 빌려 표현되는 문장들이어서 그런지 잠언 이상의 온기와 고고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심시선의 생애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 짐작된 생애가 이 소설에서는 심시선 자신의 서사가 아닌 그녀의 자식과 손주들이 펼치는 활달한 움직임과 대화를 구성해낸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이 소설을 독특하면서도 멋지게 만든다. 어째서 주인공인 심시선의 얘기는 챕터 도입부에 인색하게 배치하고 나머지는 자식과 손주들의 장황할 만큼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채우는지도 알 것 같다. 이를 테면 하와이의 훌라 이야기, 로컬들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이야기, 버터플라이피시며 물떼새 등의 자연 생태와 관련된 이야기, 재국주의 이야기, 그리고 소설 말미에 기름때 피해를 입은 바닷새와 펭귄을 씻기러 가는 이야기까지. 심시선은 죽은 지 10년이 되었고 그녀의 생애가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언어에 묻어 있는 삶의 태도는 어느새 현재의 여러 사회 및 환경 문제들에 직접적으로 당면해 있는 자손들의 생각과 결기 속에 흘러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지. 따뜻하다기보다는 어딘가 상쾌하고 시원하기까지 한 ‘심시선 식의 시선’이 유전처럼 가계도를 따라 그녀의 자손은 물론 우리에게까지 퍼지는 것은 아닐지. 그녀의 이름이 어째서 심시선인지도 알 것 같다. 이 소설의 제목이 왜 <시선으로부터,>인지도.

▲강화길의 단편소설집 ‘화이트 호스’
강화길의 문장은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 라고 쓰는 것 같다. 바르고 결단성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다소 거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거부감도 들 법하다. 그러나 강화길의 문장은 한 사람의 작가로서 쓰고자 하는 절실한 이유,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갖추어야 할 당위에 의해 불려나온 어투라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바르고 결단성 있어 보인다고 했을 때의 바르다라는 말도 옳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주저하고 망설여 일을 그르치느니 결단하고 앞만 보며 꿋꿋히 가겠다는 결의를 일컫는 말에 가깝다. 그런 문장을 장착한 강화길의 여성들에게는 과연 삶을 돌파해내는 놀라운 지혜가 있다. 그 지혜가 실은 슬픈 지혜라서 더 놀랍다. 방어적으로 혹은 스스로의 삶을 왜곡시켜서라도 가부장 사회의 장구한 억압을 기어이 뚫고 어머니의 자리를 늠름하게 세우는 것은 물론 여성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딸과 손녀를 키워내는 수고와 감투(敢鬪)가 눈물겹다.
눈물겹지만 강화길의 여성들이 결코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유는 그의 소설 안에서 여성은 이미 담담하거나 조금은 능청스럽고 위악적으로 남성 사회를 관리하고 어떤 면에서는 지배하는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더는 슬픈 지혜가 아니라 놀라운 지혜일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무조건적 행복 수혜자로서의 남성의 지혜라는 것이 바야흐로 깜깜이로 전락할 처지에 놓인 사태를 강화길은 보란 듯 내놓는다. 물론 강화길의 여성들이 아직 현실에서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하여 단지 그들은 소설적 기대인물에 지나지 않으며 강화길의 여성주의적 목적주의가 초래한 필연적 작위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강화길의 문장이 그러하듯 한 작가를 글쓰게 하고 그 글이 사회적으로 달성할 효용이 개대된다면 거두절미하고 말해볼 요령도 필요할 것이다.

◇장르 소설을 포섭한 본격 소설과 21세기 ‘난쏘공’

이승우 소설가
조선일보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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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단편소설집 '화이트호스'
장르적 요소를 포섭한 활달한 소설들이 모여 있다. 스릴러적 긴장과 둘 이상의 사건이 같이 진행되는 과격한 플롯, 짧고 속도감 있는 서술이 모여 역동적인 소설의 개성을 만들어낸다. 이 역동성은 대중성에 가까운데, 곳곳에 영민하게 숨겨 놓은 메시지들로 인해 만만치 않은 차원을 획득한다. 가령 몇 편이 소설에서 잠재적 피해자로 자처하는 화자가 실제로는 가해자일 수 있다는 암시를 함으로써 피해자/가해자의 구도를 무너뜨린다. 이 작가는 쉽게 읽히는 문장으로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확실히 이 작가의 장점이다. 그러나 그 거침없음이 계속 장점이기 위해서는 내부에 제어장치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수경의 단편소설집 '자연사박물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21세기 버전이라는 해설이 딱 어울리는 소설. 독립된 단편이지만 '난쏘공'이 그런 것처럼 (마지막 한 편만 제외하면) 인물과 사건이 서로 겹쳐서 연작소설적 성격이 강하다. 누군가는 분쇄기에 손이 잘린 후 해고되어 자살하고, 누군가는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손해배상금을 청구당하고, 누군가는 공장 굴뚝에 올라간다. 이 기시감은 조세희의 시간에서 전진하지 못했다는 신호여서 반갑지 않다. 소설의 화자는 자주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가정법 문장으로 말하는데, 끊임없이 되뇌는 이 부정의 가정법을 통해 소설은 사회 구성원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적의에 찬 구호나 공허한 수사 대신 불안정하고 불안한 노동자의 생활을 현재형으로 보여주는 정직한 소설이다.

◇여러 겹으로 된 폭력의 서사와 우리 시대 노동자의 존재

김인숙 소설가
조선일보

조선일보 DB


▲강화길의 단편소설집 ‘화이트호스’
이 소설집에 실린 첫번째 ‘음복’과 두번째 ‘가원’을 읽으며 몇번 숨을 골라야했다. 내 안의 어딘가가 깊숙히 건드려지는 기분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추억의 어떤 한 순간인 것도 같고, 바로 지금의 나인 것도 같고, 그 모든 것의 총합인 것도 같았다. 그것을 폭력의 서사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여성으로서의 나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인 나로 살아가는, 여성인 나와 함께 살아가는, 나와 당신들의 폭력. 강화길의 전작들에서 이 폭력적인 권력의 서사는 부러질듯이 다가오곤 했다. 스며들기 전에 튕겨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그래서 그 불편함이 매력적이기도 했었다. 폭력이란 건 다치게 하는 일이니까. 다치는 일이니까. 대충 다치는 게 아니라 아예 일어서지 못하도록 남김없이 짓밟히는 일이니까. ‘화이트 호스’에 실린 이번 작품들에서는 부러지는 그 순간보다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그 핵심의 관계를, 그 관계의 허상을, 결국 폭력일 수 밖에 없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들을 세밀하고도 차근차근하게 들려준다. ‘음복’에 등장하는 고모와 남편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너무나 보통이어서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해버렸던 인물들. 그들은 어쩌다 악역이 되었을까. 어쩌다가 스스로 악역인줄도 모르게 되었을까. ‘나’는 왜 누가 악역인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을까. ‘가원’에 이르면 강화길은 화자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 무책임한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이 미련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것일까”
폭력의 서사는 겹과 겹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겹과 겹이 만나는 지점을 응시하는 깊은 시선이 이야기 밖의 독자를 건드린다. 강화길의 소설은 계속 더 깊어질 것이다.

▲이수경의 단편소설집 ‘자연사박물관’
이 소설집은 연작소설들로 한편 한편의 소설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노동자의 이야기다. 노동자의 이야기를 빌려서 쓴 소설이 아니라 그 중심에서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는 소설이다. 파업과 쟁의와 투쟁. 그래서 구호인가? 노동자의 삶은 구호로만 말하여지는가? 이 소설들은 구호가 한 문장으로 말하는 것을, 한 문장으로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을, 그러나 한 문장으로는 압축되지 않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삶을 이야기로 보여준다. 구조, 체제적인 폭력에 대항하여 생존권을 지키려는 노동자들, 그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발화되어가는 과정이다.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는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문장 속에 문장이 있고, 단어 속에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구호로 뒤덮인 삶 속에는 부정당한 노동의 가치만이 아니라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다. 노동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이런 구조, 이런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힌다. 미워하고, 망설이고, 때로 비겁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설 속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시대를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소설은, 아직도, 힘주어 해야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당신은 다른 여자들이랑 달라. 사랑해.”
라고 말하는, 노조위원장인 남편에게 아내가 응답하는 말.
“사랑 같은 거, 필요 없어!”
그 사이에 감춰진 말들, 생략된 이야기들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다.

[박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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