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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 (토)

[서소문 포럼] 참 편리한 ‘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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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포기 종용까지 ‘선의’로 포장

입맛대로 변형한 공정이 분노 유발

법안·정책엔 공정 잣대 훼손 안 돼

중앙일보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이걸 찰떡궁합이라고 하나 보다. 노동단체 간부 출신과 사주가 어우러졌다. 혹여라도 훈훈한 장면을 상상했다면 착각이다. 집권 여당이란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 과정을 알면 추해 보인다.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부대변인이 노동자에게 체불임금을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무려 140억원이다. 이스타항공 직원이 일한 대가다. 그들은 생존의 벼랑 끝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이 항공사의 실질적 대주주는 같은 당 이상직 의원이다.

김 부대변인은 “선의로 중재했다”고 해명했다. 민주노총 산별연맹 위원장을 지낸 경력을 내세우면서다. 이게 실소를 터트리게 했다. 민주노총이 체불임금 포기에 동의한 적이 있던가. 같은 상황을 놓고 집권 여당의 지붕 밑이 아니라 밖에서 만났다면 어땠을까. 죽자사자 사생결단의 자세로 사주 일가를 규탄하고 투쟁했을 게다. 더불어민주당 내 을지로위원회를 찾아 정치적 압박도 불사했으리라. 그렇다면 산업별 노조 전체를 지휘하던 경력을 굳이 내세운 그가 말하는 ‘선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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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원 일가가 노동자에게 안 준 임금이 자그마치 250억원이다. 노동 착취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오죽하면 김종철 정의당 선임대변인이 “이상직 의원 일가가 고질적 문제인 편법적인 지배구조와 족벌 경영을 이스타항공에서 재현한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며 김 부대변인의 변호에 문제를 제기했을까. 임금체불은 형사처벌 대상이다.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체당금으로 밀린 임금을 대신 주고 보듬는 것도 그래서다. 한데 동료 의원이자 당직자는 그중 절반이 넘는 돈을 포기하라고 권했다. 노동자의 생존문제를 두고 집권당 안에서 끼리끼리 북 치고 장구 친 격이다.

외환위기 당시 작은 업체의 사장이 집까지 팔아 월급을 챙겨 준 눈물겨운 사례가 많았다. 어느새 라떼의 기억이 됐지만 이런 게 공정이다.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견디는 미덕은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청년들의 분노도 공정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됐다. 그 분노에 대고 “공부 좀 더 했다고 임금 두 배 받는 게 공정이냐”는 식으로 비아냥대니, 가뜩이나 취업난으로 바싹 마른 풀섶이 활활 타오를 수밖에.

명색이 노동존중을 표방한 정권이다. 공정을 기치로 집권했다. 일한 대가를 포기하는 게 공정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정도로 물썽하고 편의에 따라 변형 가능한 공정이면 부도덕이나 몰염치로 치환하는 게 낫다.

임금 포기 종용 사실이 알려진 날 더불어민주당은 국회 상임위원장을 싹쓸이했다. 독식이라고도 하고, 독재의 시작이란 말도 나온다. 공정함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걱정이 읽힌다. 당장 각종 법안을 당리당략을 떠나 제대로 다룰까 하는 의문부터 든다.

정부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국회에 다시 제출한 노조3법(노조법, 교원노조법, 공무원노조법)을 보는 시각도 그 범주에 있다. 해고자, 실직자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게 했다. 해고자가 자신을 해고한 기업을 상대로 임금·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셈이다. 노동계는 이것도 성에 안 차 “직장 점거 금지 조항을 삭제하라”고 요구한다. 더 강한 법을 만들라는 얘기다. 경영계는 반대 의사 표현 정도가 아니라 망연자실이다.

정부도 전투적 노사관계를 감안할 때 노조법이 미칠 파장을 안다. 그런데도 밀어붙이는 명분은 딱 하나다. 국제노동기구(ILO)의 노조할 권리 등을 담은 협약을 비준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글로벌 스탠다드(국제기준)를 들먹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언제까지 국제기준을 외면할 수 없다.

전 세계가 쓰는 기준이라면 반발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한데 왜 반대가 심할까. 입맛대로 국제기준을 재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형 기업 규제는 그대로 뒀다. 파업 때 대체근로 금지, 사용자에게만 적용하는 부당노동행위 같은 거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선진국처럼 두 규제를 없애면 노조법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경영계에만 국제기준에 대해 눈 감으라고 하니 문제라는 얘기다. 불공정에 대한 항변이다.

공정이 흔들리면 정책의 지성과 이성이 의심받는다. 마약 같은 이념의 몽롱함으론 의심을 풀 수 없다. 쳐내야 직성이 풀리는 정치판의 속성을 정책에는 제발 이식하지 말길 바란다. 대신 물러터진 공정을 단단히 하는 작업을 말 그대로 공정하게 진행했으면 한다. 노래 가사처럼 언제부턴가 소리 내 우는 법을 잊어가고 있는 듯해서 하는 말이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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