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하정화의 아웃룩] 치매 환자에게 자꾸 과거 기억을 묻지 마세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스틸 앨리스(Still Alice)'는 50세라는 젊은 나이에 치매를 진단받은 사람의 삶을 그린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주인공 앨리스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심리 언어학자. 누구보다 똑똑하고 의사소통에 뛰어났던 그녀가 어느 날부터인가 강연 중 익숙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25년간 살던 동네에서 길을 잃는다. 알츠하이머병은 그렇게 찾아왔다.

앨리스는 고통스러운 변화를 겪게 된다. 자신의 자랑거리였던 기억력, 언어, 지각 능력을 잃어 가고, 단기 기억을 상실해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과 그런 자신을 당황스럽게 쳐다보는 사람들 시선에 수치심을 느낀다. 마치 투명인간인 양 앨리스를 앞에 두고도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소외감을 느끼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사회에 더 이상 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외로움이 밀려온다. 차츰 가족조차 알아볼 수가 없다. 병이 더 진행되면 씻고, 옷을 입고, 화장실에 가는 것 같은 아주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 어려워질 것임을 알기에 상실감과 두려움에 빠진다.

우리나라 노인 치매 유병률 10%

소설 속 앨리스처럼 중년기에 치매 진단을 받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치매는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치매 유병률(有病率)은 약 10%나 된다. 2018년 기준으로 약 75만명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얘기다. 치매는 나이가 들수록 발병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인구 고령화가 심화되는 2039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치매로 고통받는 사람이 약 200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2016년 전국치매역학조사·2019년 장래인구추계 기반 자료).

치매로 인한 고통은 치매 환자 본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치매, 특히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 장기간에 걸쳐 인지 기능과 일상생활 수행 능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다른 만성 질병에 비해 의료비 및 부양 부담이 높다. 2016년 진료비 통계 지표에 따르면, 노인 다빈도 질병 입원 비용 중 '알츠하이머병의 치매' 환자 1인당 요양 급여 비용이 가장 높다. 또 2018년 치매 노인 유병률 조사에 따르면 치매 노인 가족 부양자 중 73.6%가 대상자를 돌보는 데 부담을 느끼며, 이 중 45.2%는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 정신적 부담이라고 응답했다.

조선일보

/그래픽=김성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세계 각국은 엄청난 노력을 쏟고 있다. 우리나라도 2008년 제1차 치매 종합 관리 대책을 수립한 이래, 지속적으로 치매 관련 정책을 확대해 왔다. 현재 시행 중인 3차 치매 관리 계획(2016~2020)에서는 치매 예방부터 진단, 치료, 돌봄, 가족의 부양 부담 경감까지 치매 환자 돌봄 전 과정에 걸친 계획이 수립됐다. 2017년 말부터는 치매 국가 책임제 도입과 함께 여러 서비스의 통합 지원을 목표로 하는 지역사회 치매안심센터가 설치되었다. 그럼에도 국가 자원이나 인력은 검진 사업과 치매 관리 체계 구축에 집중되어, 가족과 당사자의 답답한 현실을 해결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치매 환자 부양 가족 목소리 담아야

치매로 인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할까? 우선 환자 본인과 가족이 논의 주체에 포함되어야 한다. 치매 환자를 부양하는 가족들 목소리는 최근 들어 조금씩 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해 24시간 방문 요양, 가족 휴가제 등 지원책이 마련되고 있지만, 정책 입안 과정에서 치매 환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려는 노력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전문가 중심 정책은 효율적이고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치매를 겪는 개인은 관리 대상에 머무르고 객체화된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역사와 가치는 무시되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 아닌, 가족과 사회에 부담이 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미국에서 일하던 시절, 초기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자조 모임을 비롯한 여러 모임에 참여해 같은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과 사회적 교류를 지속하고, '세계 알츠하이머의 날' 행사에 참여해 경험을 나누며 치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대학병원 부설 알츠하이머 센터에서는 지역사회 극단과 협력, 초기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이 즉흥 연기 기법을 활용해 현재를 사는 법(live in the moment)을 배우는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었다.

정답이 없는 열린 질문을 던져라

환자 가족에게는 부양 부담을 줄이는 실질적 도움과 함께, 심리 사회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기억을 잃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가족인 환자와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상실감과 두려움에 대처할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얼마 전 TED 강연에서 연극학 교수이자 노인학자인 앤 배스팅(Basting) 박사는 치매가 있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일을 묻는 대신, 창의적이고 정답이 없는, 열린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했다. 예를 들면 호숫가를 걷기 좋아했던 치매 환자에게 "그때를 기억하나요?"라고 질문하는 대신 "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줄래요?"라고 질문하는 식이다. 이를 통해 가족들은 언어를 잃어버린 치매 환자와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법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증거 기반 실천 원칙을 지켜야 하겠지만, 치매라는 총체적 삶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좀 더 창의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앞서 소개한 책을 읽은 뒤 "(나는) 여전히 앨리스(Still Alice)"라는 제목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맴돌았다. 치매에 걸렸어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사회, 그렇게 되도록 지원하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하정화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