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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66] 지켜야 할 명예가 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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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규나 소설가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은 내 생에 없었어. 그가 죽었어. 난 위기를 모면한 거야. 카페에 온 것도 엄청난 행운이군.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쓸데없이 자살할 뻔했잖아. 이건 정말 운명이야. 그의 분노가 뇌졸중을 일으켰을 거야. 이제 나는 살아도 돼. 모든 것이 다 내 차지인 거야. 이 빵, 정말 맛있어요, 하베츠발너씨. 아주 훌륭해요!”

―아르투어 슈니츨러 '구스틀 소위' 중에서.

허영심만 가득한 구스틀 소위는 오페라 공연이 끝나고 서둘러 극장을 나오다가 빵집 주인 하베츠발너와 마주친다. 외투 보관소에서 새치기하려던 그를 막아선 제빵사는 소위의 군도를 움켜잡고는 순서를 기다리지 않으면 검을 부러뜨려 버리겠다며 귀에 대고 으름장을 놓는다. 소위는 그의 덩치와 자신의 검을 쥐고 있는 커다란 손에 기가 질려 입도 벙긋 못한다.

정신을 추스르고 거리로 나왔지만 온 세상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만 같다. 제빵사가 떠벌리고 다니면 어쩌지, 입 다물어 달라고 부탁하러 갈까? 이런저런 불안에 빠져들던 그는 잃어버린 군인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자살뿐이라고 판단한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품위 있게 죽기로 마음을 정한 소위는 공원 벤치에서 그만 잠이 든다.

조선일보

눈을 떠보니 아침, 배가 고파진 그는 죽음을 잠시 미루기로 하고 단골 카페에 들어가 빵과 커피를 주문한다. 종업원은 지난밤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빵집 주인이 뇌졸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소위는 뛸 듯이 기쁜 마음을 감추고 자신의 불명예를 안고 죽은 제빵사가 마지막으로 구웠다는 빵을 맛있게 뜯어 먹는다.

오직 머릿속에서만 정의로울 뿐 실제로는 비겁하고 경망스러운 장교의 끊임없는 내면 독백을 써 내려간 ‘구스틀 소위’는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190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온갖 욕설과 협박에도 예의 주시만 하던 정부와 통일부 그리고 수많은 장교를 거느린 국방부도 북한의 도발 보류 발표에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명예와 체면은 다르다. 명예와 자만도 다르다. 그 차이를 모르는 사람만이 수치심도 없이 자기만족에 빠져 행복하다.

[김규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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