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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히틀러보다 1000년 앞서 ‘인간 사냥’…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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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8]

'새 사냥꾼' 하인리히제국의 길을 열다

조선일보

중세 독일의 역사적 실체는 매우 복잡하다. 19세기에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주도 아래 ‘독일제국’으로 통일되기 전까지 중동부 유럽에는 크고 작은 정치 단위 수백 곳이 난립해 있었다. 예수가 생전에 신고 다니던 샌들을 보관하는 프륌 수도원공국(Fürstabtei Prüm) 같은 작은 나라부터 작센이나 바이에른 같은 대규모 공국까지 각국의 규모나 성격이 천차만별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길을 연 하인리히

다른 한편, 이런 난맥상을 이겨내고 과거 로마제국을 부활시켜 유럽 문명권 전체를 한 단위로 통합하려는 이상이 많은 지배자 마음속에 잠재해 있었다. 그런 기획은 명목상 유럽 최고 권위를 누리는 신성로마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제국의 길을 연 인물은 하인리히, 일명 '새 사냥꾼' 왕(Heinrich der Vogler·876~93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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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년 동프랑크왕국 국왕 콘라트가 하인리히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사자(使者)가 전하러 갔을 때 그는 새 사냥용 그물을 손보고 있던 중이었다.


912년 하인리히는 부친에게서 작센 공작 지위를 물려받았다. 야망에 불타는 그는 곧 영토 문제를 놓고 자신의 상위 군주인 동프랑크왕국의 국왕 콘라트에게 도전했다. 처음에 불손한 신하 하인리히와 다투던 국왕은 오히려 임종 자리에서 왕위를 그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끝없이 일어나는 봉건 귀족들의 봉기와 마자르족·슬라브족 등 외적의 침략에 맞서 왕국을 지켜줄 강력한 인물로 하인리히가 제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자가 하인리히를 찾아갔을 때 그는 마침 새 사냥용 그물을 손보던 중이어서 그의 별칭이 '새 사냥꾼'이 되었다.

사냥은 귀족들의 특권이다. 사냥은 말 타기와 무기 사용법을 익히고 살생 기술을 연마할 수 있으니 전투 연습으로 딱 좋은 취미다. 하인리히는 이제 새 사냥보다는 인간 사냥에 매진하게 된다. 아마도 하인리히만큼 평생 많은 전투를 벌인 인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외적 패퇴시키며 왕권 강화

왕이 된 다음 제일 먼저 할 일은 슈바벤과 바이에른 등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지역 영주들을 손보는 것이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Arnulf) 같은 강력한 인물은 아주 벅찬 상대였는데, 결국 그의 궁전까지 쳐들어가 힘으로 굴복시켰다. 그다음으로 문제가 된 지역은 로타링기아(Lotharingia)였다. 후일 로렌(Lorraine)으로 발전하게 될 이 지역은 독일과 프랑스가 수도 없이 전쟁을 벌이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의 주요 세력이 충돌하는 지점으로서, 말하자면 유럽의 급소라 할 수 있다. 하인리히는 로타링기아 공작과 결투를 벌여 그를 굴복시키고 자기 딸과 결혼시켜 봉신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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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랑크 왕국 하인리히 국왕의 아들인 오토 1세가 955년 8월 10일 마자르족(헝가리)을 독일 레히펠트에서 격파한 전투 장면. 승리를 거둔 오토 1세는 962년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을 받았다. 이에 앞서 하인리히는 마자르족과 전투를 거듭하며 왕권을 강화해 갔다. 그의 아들 오토 1세는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완전히 물리쳤고, 서유럽은 안정을 향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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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닥친 더 심각한 문제는 외적의 침입이었다. 당대 유럽을 전율케 한 이민족은 마자르족이었다. 울던 아이도 마자르족이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쳤다고 할 정도로 마자르족은 흉포하기 그지없었다. 919년 하인리히는 마자르족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다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했으나 겨우 도망가서 목숨을 구했다. 2년 후 마자르족이 독일과 이탈리아 방면으로 다시 침략해 왔을 때, 귀족들도 이 강력한 적 앞에서는 일단 강력한 군주 밑에서 단합하여 함께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인리히는 귀족 영주들의 권위를 인정하되 자신의 지휘를 받아들여 함께 적을 물리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매년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마자르족과 10년간의 휴전 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시간을 번 뒤 각지에 성벽을 정비하고 기병을 키웠다. 그리고 마침내 마자르족을 패퇴시켜 한동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하인리히는 점차 왕권을 강화했다. 마자르족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것은 그의 아들 오토 1세 때 일이다. 이때 마자르족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헝가리에 정착하게 된다.

알프스 이북 최강자로 군림

하인리히의 또 다른 위업은 왕국 동쪽에서 위협을 가해 오는 슬라브족을 누른 것이다. 928년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해 가서 브란덴부르크시를 빼앗고, 더 멀리 보헤미아 공작령까지 진격해 들어가 바츨라프(Václav, Wenceslaus) 공작에게 매년 연공을 바치도록 만들었다(바츨라프 공작은 사후 국왕으로 승격하고 체코의 수호성인이 되는 인물이다). 이후 또 다른 슬라브족의 공격이 계속되자 하인리히의 휘하 귀족들이 역공을 가해서 완전히 복속시켰고, 하인리히는 '슬라브족 킬러'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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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7월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가 독일 중부 하르츠 산맥에 위치한 크베들린부르크의 하인리히 국왕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국왕이 사망한 지 1000년이 되던 1936년부터 힘러는 나치 프로파간다에 활용하기 위해 국왕의 기일마다 이 도시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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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일련의 전투 끝에 중동부 유럽의 넓은 영토가 하인리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주변 지역 군주들도 하인리히의 힘과 위세에 눌려 그의 상위 지배권을 인정하고 예속적 동맹 지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명실공히 알프스 이북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되자 자신감에 찬 그는 황제가 되려는 꿈을 꾸었다. 서기 800년 샤를마뉴가 교황에게 로마제국 황제 타이틀을 받았으나 그 이후 황제의 권위가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질 판이었다. 사나운 귀족들을 평정하고 외적들을 눌러 이겼으니, 이제 그가 황제 자리를 요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마로 찾아가 교황을 만나는 계획을 실천하기 전에 그는 사망했다. 황제의 꿈은 그의 아들 오토 1세 때에 가서 이루어지게 된다.

[부인 마틸다 성녀가 세운 수녀원에 묻혀… 훗날 나치 聖地로]

936년, 하인리히는 자기 시신을 크베들린부르크(Quedlinburg)시가 잘 보존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후일 성녀로 시성받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아내 마틸다는 죽은 남편 하인리히를 추모하기 위해 수녀원을 짓고, 여기에 시신을 모셨다. 수녀원에는 상당한 땅을 기증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독립성을 유지했다. 그 결과 이 작은 도시는 귀족적 수녀들이 통치하는 독립국가처럼 되었다.

독일 중부 하르츠 산맥에 위치한 아름다운 천년 고도 크베들린부르크는 20세기 중엽에 돌연 나치 선동에 동원되었다. 나치 친위대장이며 히틀러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는 크베들린부르크와 그곳에 묻힌 하인리히 국왕이 나치 프로파간다에 아주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련과 전쟁을 벌이던 나치 독일로서는 슬라브족을 궤멸한 전사이며 독일 제국을 건설한 선조인 위대한 국왕을 역사의 모범으로 부각하려 했다. 국왕이 사망한 지 천 년이 되는 해인 1936년부터 힘러는 하인리히의 기일인 7월 2일마다 이 도시를 방문했다. 다음 해에는 시신을 새로운 석관에 옮겨 다시 매장했다. 마을은 온통 나치 깃발로 뒤덮였고, 수녀원은 친위대원이 상주하며 지키는 나치의 성지로 만들었다. 나치 당국은 하인리히의 두개골에 스바스티카(swastika·나치 기장) 깃발을 두르고 엄숙하게 매장하는 의식을 벌였으나 2차 대전이 끝나고 재조사했을 때 그 두개골이 가짜로 판명 났다.

나치의 선동 작업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도 동원되었다. 히틀러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었다는 이 오페라는 성배(聖杯)를 지키는 신비의 기사가 은빛 갑옷을 입고 백조가 이끄는 배를 타고 등장하여 귀족들 간 내분을 끝내고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치도록 이끈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새 사냥꾼' 하인리히 국왕은 독일 전역을 돌며 민족의 단합을 주장한다. 사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이 나치에 그토록 악용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칼을 휘두르며 이방인 적들을 무찌르자는 노래를 하는 장면은 바그너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치 독일의 군사 정복을 찬미하는 프로파간다로 작용했다.

크베들린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중요한 성지였기 때문에 귀중한 역사적 유물이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마을 주민들은 이 보물들을 지하 갱도로 옮겨 보호했다. 전쟁 말기에 이 지역에 진격해 온 미군은 유물들을 맡아서 잘 지켜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 후 가장 중요한 보물 8점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교회 당국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절도범이 누구인지 밝히려 했으나 이 지역이 동독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조사가 중단되었다. 후일 메더(Meador) 중령이 보물을 훔친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여 감식안이 있어서 좋은 유물만 가려 훔쳐 간 것이다. 그의 후손과 미국 및 독일 정부 간 재판과 협상 끝에 귀중한 유물들은 원래 장소로 돌아갔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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