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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70년前 파리의 잔인한 '봄바람'은 지금도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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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도 사랑한 영화 '트랜짓'

"경기장에 수용소를 만들었어.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 있어. 봄맞이 대청소라는군."

2일 개봉하는 영화 '트랜짓(Transit)'은 프랑스인들에게 지금껏 상처로 남아 있는 현대사의 비극을 툭 건드리면서 시작한다. 1942년 독일 점령 당시 파리에서 일어났던 '벨로드롬 경기장 사건'이다. 당시 경기장에 억류됐던 유대인 1만3000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중 4000여 명은 어린아이였다. 당시 작전명이 '봄바람'이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프랑스인들에게 원죄 의식으로 남았다.

조선일보

프랑스 남단 마르세유에서 정치범 게오르크(왼쪽·프란츠 로고프스키)는 역시 탈출을 꿈꾸는 마리(파울라 비어)와 사랑에 빠진다. /M&M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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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동독 여성 작가 안나 제거스(1900~1983)의 소설 '통과 비자'를 각색했다. 주인공 게오르크(프란츠 로고프스키)는 독일 좌익 정치범. 나치의 체포를 피해서 프랑스 파리로 달아났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진다. 결국 그는 대서양을 건널 계획으로 남단 마르세유로 향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정치범과 유대인들에게 '통과 비자'는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구명줄과도 같다. 여기엔 1933년 나치 게슈타포에 체포됐다가 풀려난 뒤 10여 년간 망명 생활을 했던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다.

초반부만 보면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전형적인 시대물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기묘한 이질감이 생긴다. 오토바이와 경찰 차량, 카페와 CCTV까지 눈앞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과거사의 비극을 21세기 프랑스로 옮겨와서 새롭게 촬영한 것이다. 현재 서울 한복판에서 일제강점기의 경성(京城)을 찍는 것 같다고 할까. 시대극이라는 내용과 실험극이라는 형식의 충돌이야말로 이 영화의 독특한 매력이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좋아하는 영화로 뽑기도 했다.

역사적 고증을 포기하고 현대적 배경을 택한 이유는 영화 후반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오늘날 전쟁·재난으로 정처 없이 세계를 떠도는 난민들의 비극적 운명이 2차 대전 당시와 다르지 않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재부상하면서 난민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물이라는 안전지대로 회귀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2차 대전이 배경이지만 역설적으로 전투 장면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암울한 버전을 보는 것 같다. 흔히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부른다. 이 영화처럼 그 정의에 들어맞는 작품도 드물 듯싶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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