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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위안부’ 연구가 짊어진 두 과제…왜곡 바로잡기와 외연 확대 [‘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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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강정숙 전 한국정신대연구소 소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역사 연구는 피해자 등의 증언과 문헌자료가 중심이 되어왔다. 이러한 점에서 피해자 증언 확보는 중요하다. 연구자들 중에 피해자 증언 관련 자료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혹은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통해 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정의연의 문제로 제기하기도 한다. 이는 이 운동의 실상을 너무 모르고 하는 발언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운동은 1991년 김학순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했다. 정대협은 1990년 11월 이미 조직됐다. 김학순 이후 잇따른 피해자들의 출현과 피해자들의 열악한 상태를 보고 정대협 등 관련 단체들은 피해자 지원을 위한 법 제정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가 1993년 6월 제정된 일제하일본군위안부에대한생활안정지원법이다. 피해자들은 피해신고, 심의 과정을 거쳐야 했고, 정부는 피해자에게 비밀유지를 약속했다. 피해자가 스스로 공개하지 않는 이상,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 없었다.

예외적으로 관련 운동단체들은 초기부터 피해신고와 피해지원 등의 활동이 있어 피해자와 만날 수는 있었다. 그런 신뢰 위에 한국정신대연구회는 피해자의 심층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피해신고에서 역할을 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있었다. 이후 상황은 변했지만 그래도 ‘어쩌다’ 이 주제로 연구하려는 이들의 피해자 접근은 당연히 어려웠다. 이는 정대협이나 정의연의 책임이 아니라 피해자 보호 때문이었다.

‘피해자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은 목소리들은 묻혀야 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떤 ‘피해자 이미지’인지는 논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민족주의적 경향, 정형화된 피해자상을 의미한다면 부분적으론 맞지만 많은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김학순은 기생학교 출신이었는데 이는 정형화된 피해자상인가. 그리고 한국정신대연구소와 정대협이 공동 간행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집에 실린 하영이는 인도네시아에서 군‘위안부’로 있다가 위안소 업자의 현지처가 되어 위안소를 경영한 피해자였다. 책 간행 당시에도 일본 우익이 왜곡 선전할까 염려했지만 결국 증언집에 실었다. 이처럼 일본 움직임에 대응해 전략전술적 고민은 있었으나 사실 왜곡은 없었다.

한국 사회의 초기 ‘위안부’ 이미지, 즉 처녀이고 물리적 강제로 끌려간 여성이란 이미지가 있긴 했다. 이건 관련 운동단체나 연구회에서 혼자 책임질 부분이 아니다. 이런 이미지는 오히려 언론이나 문화매체에서 재생산된 바가 크다. 증언집을 읽어본 이라면 책을 펴는 순간 피해자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우리의 초기 인식 수준을 거머쥐고 지금도 ‘(일본) 정부가 발견한 자료에는 군과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는 1993년 일본 정부가 인정한 책임 문제를 덮으려는 수사일 뿐이다.

이번 사태로 과거 운동과 연구의 불균형, 연구의 부족도 언급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역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30년 역사에서 초기 10년의 조사연구는 한국정신대연구회(소)가 중심이었고 증언집 간행에 집중했다. 여기에 정부 지원은 거의 없었으니 연구자의 헌신 위에 작업이 진행됐다. ‘위안부’ 연구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남북코리아 피해자는 대부분 국내에 있는데 이를 밝힐 자료는 대부분 국외에 있다는 점이었다. 확장된 연구를 위해선 국외조사가 필수적이었으나 초기에 이를 지원해주는 기관이 없었다. 최근 10년은 기존 단체와는 별개로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등 정부(출연)기관에서 자료 발굴과 연구를 촉진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연구가 필요할까? 이번 논의를 통해 확인된 것은 새로운 연구도 중요하지만 이미 연구돼 있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정신대, 성노예, 위안부 등 용어 문제도 제기됐는데 20년 전 이미 연구됐으나 일반에 전해지지 않았다. 그 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책임, 그리고 한·일 우익들이 ‘위안부’제를 공창제와 동일시하는 이유 등도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군속이라는 직책과 일본군 ‘위안부’제의 관련성도 주목할 부분이다. 일본군은 내부규정에 의해 군속을 군위안소 업자로 삼기도 하고 군위안소 업자를 군속으로 삼기도 했다. 패전한 이후엔 군‘위안부’를 군인군속명부에 수록하고 이들을 군속으로 삼았다. 군‘위안부’제는 일본군만이 아니라 ‘위안부’를 수송한 철도와 선박을 비롯해 많은 기업들이 ‘위안부’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점에서 일본 전범기업도 연구해야 한다. 이런 연구 위에 동아시아 전역의 군‘위안부’ 실상과 전체 수 등도 밝혀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꼭 수행됐으면 하는 주제는 세계의 분쟁(혹은 전쟁)하의 성폭력·인권침해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부터 오랫동안 국제 활동을 편 정대협과 정의연은 가해국 일본이 유엔 등이 제시한 방침대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중반 국민기금이나 2015년 한·일 합의 등에서 늘 현실론에 입각해 위로금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피해자 중심의 입장에서 이 두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운동과 연구는 피해자를 중심에 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앞으로 생존자 없는 시기의 활동을 생각해야 한다. 30년간 축적된 관련 자료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공유하며 연구를 촉진할 것인가. 이미 논의가 시작된 여성인권평화재단 건립이나 ‘인권운동가 이용수’님이 이야기하듯 학생들 교육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위안부’ 관련 박물관, 역사관들도 연구와 교육, 운동, 전시 등이 상시 유기적으로 연계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시리즈 끝>

강정숙 전 한국정신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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