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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매경포럼] 위선도 가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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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우리는 위선과 가식을 인격적 결함으로 생각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두 결함이 제거된 문명에서 살아가는 것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을 걷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이기심, 공격성, 탐욕, 질투 같은 어두운 내면을 위선과 가식으로 위장하고 살아간다. 위장 없는 세상에선 오직 '욕망'과 이를 관철할 '힘'이 중요하다. 설령 그게 삶의 진상이라 해도 겉으로는 누구나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치로 포장하는 세상이 좀 더 평화롭다. 가식이라 해도 말이다.

요사이 여권을 보며 '적나라하다'는 표현을 자주 떠올린다. 권력의 욕망을 드러내고 근육을 과시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총선 전에는 나름대로 재고 세상 눈치를 본다는 느낌이 조금은 있었다. 지금은 '옳고 그른 기준은 우리 스스로 정한다'는 확신이 생긴 것 같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향해 "내 지시 절반을 잘라먹었다" "이렇게 말 안 듣는 검찰총장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이 '내가 당신보다 높아. 그거 알아?'로 들린다. 위선도, 가식도 없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유죄로 확정 판결한 한명숙 전 국무총리 뇌물 사건과 관련해 여당 의원들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대법원을 추궁하고 추 장관은 검찰 감찰을 지시했다. 그 이유라는 것은 수감 중인 사건 관계자 주장이 달라졌다는 것뿐이다. 물적 증거는 그대로다. 각설하고 개인 송사에 국회와 법무부가 발 벗고 뛰는 게 정상인가. '우리에게 힘이 있다. 고로 정의도 있다.' 이 소리 같다. 위선도, 가식도 없다.

여당은 방송통신위원회를 비롯한 각급 위원회 추천권을 의석 비율을 반영해 재배분하자고 한다. 방통위 상임위원은 5명으로 2명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1명은 여당, 2명은 야당 교섭단체가 추천하게 돼 있다. 야당 추천권은 여당의 방송 장악을 막는 안전장치다. 이걸 의석수대로 나눠 갖자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총선에서 야당이 176석을 얻었으면 야당 추천권을 3명으로 늘려주자 했을 것인가. 우악스러운 힘의 논리다. 위선도, 가식도 없다.

민주주의를 그럭저럭 굴러가게 하는 두 가지 규범이 있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다. 상호 관용은 '저들도 우리처럼 나라를 걱정하고 헌법을 존중한다'는 믿음이다. 경쟁하되 '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제도적 자제는 법이 허용한다 해서 모든 힘을 다 쓰지는 않는 것이다. 다 쓰면 정치는 '전쟁'이 된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2명이 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미국 정치가 양극화하는 이유로 두 규범의 붕괴를 꼽고 있다. 한국에서 여야가 헌법 가치를 공유하고 상대가 나라를 걱정한다 믿었던 시절은 언제였던가. 그 점에선 차라리 군사정권 시절 여야가 지금보다 친연성이 있어 보인다.

이제는 자제 규범마저 급속히 해체되고 있다. 선거법은 여야 합의로 처리한다는 불문율이 지난해 깨졌다. 법사위원장은 야당 몫이라는 관행이 이번에 무너졌다. 여당은 국회 상임위원장직을 싹쓸이했는데 32년 만의 일이다. 야당에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비토권이 있다. 여당은 시행하기도 전인 공수처법을 개정해 비토권을 무력화하겠다고 한다. 자제는 어디에 있나.

조국부터 윤미향에 이르기까지 여권의 위선이 문제가 된 경우가 여러 번이다. 위선이 탄로 났을 때 취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꼬리 자르기나 반성하는 시늉을 통해 파장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가식으로 위선을 덮는 것이지만 잘못은 인정한다. 또 하나는 '그래도 너보다는 나아' 하며 비판자를 '토착왜구'로 공격하는 것이다. 여권은 후자 전략을 택해왔다. 176석이 생긴 지금은 위선이나 가식을 꾸며야 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뭐? 불만 있어?' 이런 느낌이다. 맨근육만 보인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무너진다. 위선도 가식도 없이.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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