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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동서남북] '노무현 정신 계승' 외칠 자격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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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존엄'처럼 文 떠받드는 여권… 대통령 말씀, 근거 안 따지고 집행

조선일보

최승현 정치부 차장


인천국제공항공사 논란에 대한 미래통합당 하태경 의원의 비판은 정곡을 찔렀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천공항을 방문한 2017년 5월 12일 이전 입사자만 '로또 취업' 행운. 북한 김정은이 현장 지도한 회사에 성은이 내려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였던 이날 첫 외부 일정으로 인천공항을 찾아 비정규직 보안요원 앞에서 "임기 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최근 이들 1902명은 실제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문 대통령이 의미를 둔 일정에 직접 만나 공약을 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갖은 논란에도 이들의 신분이 바뀔 수 있었을까? 전체 임금 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이 36.4%(작년 8월 통계청 집계 기준)로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시기에 유독 말이다. 여권이 청년들 분노에 제대로 대응할 의지가 있다면 이런 기초적 의문부터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조금 더 배워 정규직 됐다고 비정규직보다 임금 더 받는 게 불공정"이라는, 자기도 무슨 소린지 모를 '아무 말' 대신 말이다.

물론, 선거로 뽑힌 민주공화국 대통령의 통치를 북한의 세습 독재에 비유한 것은 지나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지난 3년여를 보면, 여권과 지지층 전체가 불가침(不可侵)의 권위를 지닌 '최고 존엄'으로 문 대통령을 떠받드는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이런 체제에서 거룩한 대통령 말씀은 법·제도적 근거를 묻거나 따지는 일 없이 집행돼야 한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몰아내기 위한 여권의 궤변론적 공세도 그렇다. 문 대통령이 "마음의 빚을 졌다"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일가 비리 의혹과 문 대통령의 30년 지기 송철호 울산시장 선거 관련한 청와대 개입 의혹 등을 방치했다면, 윤 총장은 "살아있는 권력도 수사해달라"는 지엄한 당부의 외면에도 찬란하게 임기를 이어갔을 것이다. 추미애 장관부터 초선 의원들까지 인신공격성 '막말'로 윤 총장에게 수모를 안기는 것을 보면, 역린(逆鱗)을 건드린 중죄인에 대한 전제군주 시대의 국문(鞠問)이 떠오른다. 여권이 2015년 뇌물 수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대법원 판결 뒤집기에 나서며 '법치주의 무력화' 논란을 빚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한 전 총리를 향해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 무죄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여권이 이를 암묵적 '교시'로 받아들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문재인 당 대표 비서실장을 지낸 최측근 출신 국토교통부 장관은 3년간 20여 차례 부동산 대책으로 역대 정권 최고의 집값 상승률을 기록하는 '대참사'의 주역이 됐다. 그런데도 그가 경질은커녕 경제부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착란적 상황도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다.

현 정권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외치는 '노무현 정신'의 요체이자 당시 정권의 핵심 업적은 권위주의 청산이다. 여야와 좌우가 모두 동의하는 대목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제왕적 권위주의 정치를 몰아내겠다"며 수평적 토론을 일상화했다. 한·미 FTA 등을 놓고 여당 의원, 지지층과 격렬한 논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통령 하는 일이 절반은 욕먹는 것"이라며 웃어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계승자라는 문재인 정권은 거꾸로 간다. 국회 17개 상임위를 독식하고도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을 향해 직언 대신 감언을 할 수밖에 없는 맹목적 상명하복이 지배한다. 삼권분립은 사라졌다. 군부정권 못지않게 대통령이 군림하는 권위주의적 암영(暗影) 속에 '민주주의가 몰락하고 있다'는 한탄이 나온다. 이들이 과연 '노무현 정신을 이어간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걸까?

[최승현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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