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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500년 전까지 거슬러올라간 '美 백인 역사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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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질된 흑인 추모 시위… 초대 대통령 조각에 피칠갑, 콜럼버스는 목 잘라

지난 30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의 워싱턴 스퀘어 파크. 공원 관계자들이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조각상 두 점에 올라가 약품으로 박박 닦고 있었다. 전날 새벽 괴한 3명이 시뻘건 페인트를 뿌리고 도망가서다. 아무리 닦아도 핏자국 같은 얼룩이 남았다. 100년 넘은 랜드마크가 훼손된 모습에 뉴요커들은 충격받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범인들을 찾아내 10년 징역형을 때려야 한다"고 폭발했다.

7㎞ 떨어진 자연사박물관 입구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기마상은 경찰 10여명이 엄호 중이었다. 곧 철거를 앞두고 있지만 워싱턴처럼 욕을 당할까봐서다. 세워진 지 80년 된 이 동상은 루스벨트가 흑인과 인디언을 이끄는 백인 정복자처럼 표현됐다는 이유로 이미 철거가 결정됐다. 또 뉴욕시청 전면에 유색인종을 이끄는 모습으로 조각된 정의의 여신은 '정의는 없다'는 낙서로 난도질됐다.

조선일보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 있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조각상에 시뻘건 페인트가 뿌려져 있다. 워싱턴은 흑인 노예를 둔 농장주였다는 이유로 일부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로부터 비난받고 있다. /EPA 연합뉴스·그래픽=백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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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경찰력이 기념물 파괴 대응에 집중 투입되면서 경범죄 단속은 손을 놓다시피 했다. 맨해튼에서 보기 힘든 불법 주정차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고, 마스크 쓰지 않은 이들을 제지하는 이도 없었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이 촉발한 미국의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백인 지배의 역사를 지워버리자'는 파괴적 행위로 번지고 있다.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를 내건 시위가 엉뚱하게 반달리즘(vandalism·문화 역사물 파괴 행위) 광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플로이드의 안타까운 사망에 분노하던 여론도 변곡점에 이르고 있다. 진보 매체인 CNN의 앵커들도 "도대체 얼마나 더 한 뒤 멈출까요"라고 걱정하고, 뉴욕타임스는 "지금의 정서로 과거사를 단죄하는 게 온당한가"라고 비판했다.

최근 한 달 새 벌어진 백인 역사 지우기는 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동상은 보스턴·미네소타·오하이오주 등 미국 10여곳에서 목이 잘리고 페인트를 뒤집어썼다. 18세기에 살았던 국부(國父) 조지 워싱턴은 흑인 노예를 둔 농장주였다는 이유로 뉴욕·시카고·오리건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동상이 훼손됐다. 그의 이름을 딴 수도 워싱턴DC, 조지워싱턴대의 이름도 바꾸자는 말이 나온다.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동상조차 링컨이 '무능한 흑인에게 자비를 베푼 백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며 공격받는다.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군 승리로 이끈 민주당 소속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이름은 그가 총장을 지낸 프린스턴대 국제관계대학원 '우드로 윌슨 스쿨'에서 지워지게 됐다. 윌슨은 20세기 초 흑인 학생의 입학을 막았다는 이유에서다. 예일대는 설립자 엘리후 예일이 18세기 노예무역에 관여한 죄로 교명을 바꾸자는 주장이 거세다.

서부극의 대부로 불리는 배우 존 웨인의 이름을 딴 캘리포니아의 '존 웨인 공항'은 '오렌지 카운티 공항'으로 바뀐다. 웨인이 1971년 플레이보이 인터뷰에서 "흑인들이 책임감을 갖출 때까지 백인 우월주의는 필요하다고 본다"고 한 발언이 문제 됐다. 미 국가(國歌)를 작사한 프랜시스 스콧 키는 노예 소유주였고, 미국에서 존경받는 '돈키호테' 작가인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동상은 노예를 굽어보듯 만들어졌고, 인도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는 아프리카인을 '검둥이(kaffir)'로 부른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공격받는다.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이끄는 운동가 숀 킹은 "중동 출신 예수를 유럽 백인으로 묘사한 동상과 벽화, 스테인드글라스도 다 없애자"고 주장한다.

역사 속 인물을 재평가하자는 움직임이 미국 전반의 불평등 해소가 아닌 미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질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움직임을 '무법 좌파(lawless left)'로 부른다. 코로나 방역 실패와 각종 구설로 지지율이 폭락했지만, 트럼프는 극좌파의 폭주 속에 자신이 '미국의 수호자'임을 내세워 회생을 노린다는 분석이다. 그는 지난 26일 역사적 인물 동상 파괴를 엄벌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내렸으며, 독립기념일을 앞둔 3일 사우스다코타 러시모어산(山)의 전임 대통령 4인 조각을 찾는 퍼포먼스를 할 예정이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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