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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1 (금)

"의원님, 쓸데없는 법안은 이제 그만 발의하세요."[우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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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정진우 기자] [편집자주]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the300][우리가 보는 세상]21대 국회 한달만에 법안 1100건 발의…국민에게 꼭 필요한 법인지 따져야

# 지난해 11월 말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이 작심 발언을 했다. 유 전 사무총장은 “의원님들이 쓸데없는 법을 너무 많이 낸다”며 “법 같지도 않는 법이 쌓여서 2만건이 넘었다”고 말했다. 운영위 참석 의원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별다른 논쟁은 없었다. 대선배인 유 전 사무총장(14·17·19대 국회의원)의 얘기가 구구절절 맞아서다. 며칠 후 연말 송년 모임 자리에서 이 에피소드를 놓고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이 의원은 “솔직히 국회가 파행돼서 안 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때가 있다”며 “평소 ‘일하는 국회’를 강조해왔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씁쓸하다”고 했다.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엉터리 법안이 많기 때문이다. 무작정 상임위원회와 본회의를 열고 통과시키면 그게 오히려 국민에게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국회가 열리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그의 바람이 통했던걸까. 20대 국회는 여야 대치 속 잦은 파행으로 역대 최저 법안 처리율을 기록했다. 총 2만4141건의 법안이 발의됐는데, 9139건만 처리됐고 1만5000여건은 폐기됐다. 법안처리율은 37.8%에 불과했다. 물론 유 전 사무총장의 말대로 ‘법 같지도 않는 법’들이 무더기 발의된 탓이다.

국민의 이목을 끄는 사건·사고가 발생해 사회적 이슈가 될 때면 어김없이 의원들이 관련 법안을 낸다. 의원들에게 구체적인 내용을 물어보면 모를때가 많다. 그 사건의 피해자나 핵심 내용을 붙여 ‘OOO법’으로 출입기자들에게 친절하게 홍보한다. 또 기존 법안에 간단한 조항을 넣거나 자구를 수정하는 등 필요 이상의 개정안을 발의한다. 어떤 의원은 4년간 600건 이상 발의해 시민단체가 상을 줬다. 의원들이 경쟁적으로 법안을 내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법은 기본적으로 규제다. 법을 만든다는 건 규제를 더 늘린다는거다. 의원들 스스로 법안 발의가 오히려 규제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신중하게 접근해야한다. 의원들이 말로는 ‘경제활성화’를 외치고선 기업활동을 옥죄는 법을 다수 발의하는 건 이제 뉴스거리도 아니다.

이처럼 의원들이 시도때도 없이 법안을 내는 이유는 각 정당의 잘못된 평가 시스템 때문이다. 당이 공천 심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량평가로 의원들의 법안 건수를 체크한다. 각 당이 평가 시스템을 바꿔야 이 문제가 해결된다. 법안을 무작정 많이 발의했다고 상을 줄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법인지 따져서 평가를 해야한다. 아울러 법안을 발의하기 전에 규제영향평가를 받도록 해야한다. 이 법이 만들어졌을 경우 국민 편익이 얼마나 있는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엄정하게 분석해야한다.

최근 국회 입법조사처가 입법영향평가제도 도입을 해결책으로 소개해 주목을 받았다. 이 제도는 법률이 국가와 사회 또는 개인에게 미치는 중요한 영향을 입법 전후로 체계적으로 예측하고 분석·평가하는 게 골자다. 해외에선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걸 도입하려면 국회법 개정이 이뤄져야한다. 하지만 의원들의 반대가 거세다. 의원들의 입법권을 침해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국회의장(6선)을 지낸 정세균 국무총리가 따끔한 지적을 했다. 정 총리는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통해 "21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에 대한 자체적인 규제심사제도가 반드시 도입될 수 있도록 뜻을 모아 달라"고 했다. 정 총리조차 직접 정책을 추진하다보니 규제에 막혀 일하기 힘들다고 호소한다.

신뢰받는 국회의 첫 번째 조건은 국민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다. 일하는 국회는 무조건 법안만 발의하는 국회가 아니다. 국민 삶에 반드시 필요한 법을 만들어 빠른 시일내 처리하는 게 중요하다. 쓸데없는 법이 넘치면 꼭 필요한 법이 묻힌다. 그러면 ‘일 안하는 국회’가 되는거다. 21대 국회의원들의 임기가 시작된 지 한달이 지났는데, 벌써 1100건 넘는 법안이 발의됐다. 한달동안 과연 얼마나 깊은 연구를 통해 발의됐을지 의문이다. 의원들이 보여주기식 쓸데없는 법안, 법 같지 않는 법을 발의하지 않는 게 ‘일하는 국회’의 출발점이다.

머니투데이



정진우 기자 econpho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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