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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목)

일하는 자리에서는 일만 한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가[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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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처음엔 음악계만 엉망인 줄 알았다. 음악학교에서 조심해야 할 남자 선생들에 대한 소문들이 꾸준히 들려왔다. 놀랍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몰라서는 안 될 일이었다.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건 모두가 공유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2016년, 문화예술계의 각계각층에서 성폭력 고발이 이루어졌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_내_성폭력’이라는 형태의 해시태그를 단 고발문이 분야만 바뀐 채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2018년, ‘미투 운동’이 시작되자 이것이 특정 업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삶에 만연한 문제였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됐다. 단 한 번도 성폭력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그것에 단 한 번도 분노해보지 않은 여성은 없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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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처럼, 해일처럼 닥쳐온 이 일들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동료들이 이 일들을 마침내 해결 가능한 문제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첫 단계는 사태 파악이었다.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이 분위기가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체감하고, 이게 누군가 회피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둘째는 자기반성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반성해야 하고 앞으로는 무슨 실천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게 괴로웠다. 모든 실천에 앞서 필요한 것은 반성이었다. 페미라이터가 제안한 문학출판계 성폭력·위계 폭력 재발을 막기 위한 작가 서약의 첫 번째 항목, ‘나부터 시작하겠습니다’를 오래 마음에 품고 지냈다.

마지막 단계는 실천 방안을 고민하는 일이었다. 나는 피해자와 연대하는 정도였지만, 수많은 문화예술계 종사자는 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아래 제각각의 단체를 형성해 전형적인 성폭력 패턴과 장르별 특성을 분석했고, 방지책을 마련해 나갔다.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WACA: 여성문화예술연합’도 생겨나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법제적 예방책을 강구했다. 각종 문화재단과 학교를 비롯해 예술단체들도 이 문제를 깊게 고심했다. 많은 이들이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이제 두려움에 떠는 것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일 것이고, 가해자들이 지난날을 반성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최근 미술계·음악계 남성이 자행했다는 언행은 내 기대를 처참히 무너뜨렸다. 그들은 회의에서 성관계를 운운하고, 학생의 목덜미가 예쁘다는 발언을 하고, 학생의 호텔 방에 침입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들은 물론 권력의 자리에 있었다.



예술계와 예술학교에서 벌어진 권력형 성폭력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빠짐없이 불쾌하지만, 이번 고발이 더욱더 놀라운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성폭력 문제로 분투하는 동안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교육하고자 하는 사안이 그렇게 복잡한 것도 아니다. 남의 몸에 손대지 않는다. 일하는 자리에서는 일만, 공부하는 자리에서는 공부만 한다. 권력을 이용해 성희롱·성폭력을 하지 않는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가? 어려워서 아직도 몰랐던 것이라면, 갖은 노력을 해서 배워야 한다. 반복과 연습과 노력의 미덕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배웠을 예술인이 아니던가. 모르면 알 때까지, 틀리면 맞을 때까지, 안 되면 될 때까지. 그걸 배우지 못한 자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보라.


신예슬 음악평론가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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