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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시위대에 권총, 곳곳서 진상...차원이 다른 미국 김여사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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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궐하는 코로나바이러스와 흑인차별 반대 시위가 미국 전역을 수개월째 휩싸면서, ‘카렌(Karen)’이란 이름의 백인 여성이 트위터와 리딧과 같은 소셜미디어와 미 언론 매체에서 수시로 등장한다. 통칭 ‘카렌’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우리로 따지면 백화점에서 맘에 안 든다고 주차요원이나 매장 직원을 무릎 꿇게 하고, 남의 집 차고 앞에 버젓이 고급 수입차량을 세우고, 식당에서 툭하면 매니저를 오라고 소란을 피워 화제가 되는 ‘김여사’의 미국판(版)에 해당한다.

조선일보

6월28일 세인트루이스 자신의 집앞 사유도로를 지나는 흑인 인권 시위대에게 권총을 겨눈 패트리샤와, 뒤에서 반자동소총을 든 남편 마크 매클로스키 부부. 미 매체들은 이들을 '켄과 카렌'으로 불렀다./UPI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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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자신 집 앞 사유지 도로를 지나간다고 권총을 들고 나와 겨눈 백인 여성이나, 다음달 텍사스주의 한 슈퍼마켓에서 마스크를 착용해달라는 말을 듣고 열 받아 카트와 진열대의 상품을 모두 바닥에 내던진 백인 여성, 5월말 뉴욕 시 센트럴파크에서 개에 목줄을 채워달라는 흑인 남성에게 되레 “나를 공격하려 한다”며 경찰에 신고한 젊은 백인 여성들이 다 ‘카렌’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이름은 따로 있지만, 미 언론과 소셜미디어는 이들의 영상을 소개하면서 모두 ‘카렌’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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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에서 휴지 싹쓸이를 하지 말라며, '카렌'을 조롱하는 소셜미디어 리딧 게시글/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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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초기 슈퍼마켓에서 서로 휴지를 싹쓸이하려고 몸싸움을 하고, 주(州)정부의 ‘사회적 봉쇄’ 정책에 저항해 거리에 나와 미국 국기를 흔들며 “당신네 과학은 못 믿겠다”고 외치고, 해변에서 자기 아들의 정신을 헷갈리게 한다고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성에게 “몸을 가리라”라고 훈계하고, 식당에서 “매니저 나오라”며 소란을 피우는 등 하나의 카렌 스토리가 사그라지기 무섭게 새로운 카렌 스토리가 등장해, 점잖은 미국 매체에서도 ‘이웃집 카렌’ ‘카렌 공화국’이란 특집 기사 제목이 나올 정도다. 워싱턴 포스트는 “카렌은 도처에 있다”고 했다.

◇‘카렌’의 정의는

캔사스주립대에서 사회나 인터넷 상에서 전파되는 유행 문화(meme·밈)를 연구하는 헤더 수잔 우즈는 “카렌에게 세상은 자기 기준에 맞춰 존재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기꺼이 희생시키려는 여성”이라고 규정했다. 작년 12월 뉴욕타임스는 “모든 일에 스스로 경찰 노릇을 하려는 백인 여성”이라고 했다. 월간지 애틀랜틱 몬슬리는 흑인에 대한 인권 차별이 논란이 되는 지금, “사회 제도나 관습상의 특권을 이용해, 흑인을 협박하거나 위협하는 백인 여성”으로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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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말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개줄을 묶으라는 흑인 남성을 경찰에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신고한 백인 여성을 '카렌'으로 보도한 뉴욕포스트 웹사이트 화면/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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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카렌’일까

인터넷 매체 ‘컨버세이션’에 따르면, 신생 여아(女兒)의 이름으로 카렌이 정점(頂點)을 찍은 때는 1965년이었다. 그 해 3번째로 많이 붙인 이름이었다. 1960년대 미국 인구의 80%는 백인이었다. 그들이 이제 50대가 됐고, 따라서 2020년에 ‘카렌’이란 퍼스트네임을 가진 사람은 압도적으로 ‘백인 여성’이다. 이기적으로, 교양 없게 행동하는 여성을 일컬어 ‘카렌’이라고 붙이게 된 배경 중 하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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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시 공원에서, "무섭다"며 야외에서 바베큐파티를 하는 흑인들을 신고한 '바베큐 베키'/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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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하는 백인 남성, 트럼프도 ‘카렌’으로 통칭

늘 ‘카렌’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1990년 대 이후 수년 전까지만 해도 ‘베키(Becky)’였다. 2018년 5월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시의 한 공원에서 야외 바비큐가 허용되지 않은 곳에서 흑인들이 고기를 굽는다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너무 두렵다. 빨리 오라”고 한 백인 여성 제니퍼 슐티도 ‘바비큐 베키’로 불렸다. 이밖에 흑인 소년의 백팩이 자신의 몸에 닿았다고 “애한테 성추행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한 백인 여성, 자기 집앞 길가에서 흑인 8세 소녀가 당국의 허가(permit) 없이 음료수를 판다고 신고한 백인 여성은 각각 본명과 다르게 ‘코너스톤 캐롤라인’ ‘퍼미트 패티’로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대세가 ‘카렌’이다. 비슷하게 ‘진상 짓’을 하는 백인 남성은 ‘케빈(Kevin)’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애틀랜틱 몬슬리는 최근엔 남성도 ‘카렌’이라 불린다고 전했다. 이 잡지는 5월28일 “CNN 방송과 같은 비판적인 언론을 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위협적인 발언은, 범법행위가 발생하지 않아도 일단 경찰을 불러 상대방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카렌’과 다를 바 없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최고 카렌’(The Karen in Chief)”라고 불렀다.

[이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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