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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링컨·존슨도 인종주의자라는데…미국의 ‘과거 청산’ 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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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연합 문양이 새겨진 미국 미시시피 주의 깃발이 주지사 관저 앞에서 게양되어 있다. 미시시피는 6월30일(현지시각) 주 깃발에서 남부연합 문양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미시시피는 미국에서 남부연합 문양을 깃발에 사용하던 마지막 주였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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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위인들은 퇴출되는 것인가?

약소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해 미국의 이상을 세계에 전파한 우드로 윌슨도, 부패한 부자와 독점기업과 싸운 개혁의 영웅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미국 대중문화를 세계에 전파한 서부영화의 대부 존 웨인도 인종주의 혐의 앞에서 호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들의 이름이 공공 기관이나 건축물에서 지워지는 결정이 내려지거나, 시도되고 있다. 과거 남북전쟁 때 인종차별과 노예제를 옹호했던 남부연합의 깃발 등 상징들도 공식 석상에서 내려지고 있다. 더 나아가, 인종주의 견해와 언행을 한 사람들의 동상이나, 그들이 이름이 들어간 기관과 건축물이 퇴출되고 있다.

지난 5월25일(현지시각) 경찰 연행과정에서 목이 짓눌려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항의하는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의 파장이다. 이런 흐름에 냉소적인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조지 플로이드가 미국의 위인들을 모두 죽이고 있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현재의 가치관과 기준으로 과거의 인물을 무 자르듯이 평가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다. 역사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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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평등함을 믿지 않았던 링컨


“백인과 흑인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평등이란 조건 위에서 두 인종이 함께 사는 것을 영원히 금지하는 육체적인 차이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누가 보더라도 전형적인 인종주의 발언이다. 그런데 이 발언은 미국 노예해방의 아버지로서 미국에서 가장 숭앙받는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했다. 그는 1858년 일리노이 상원의원 선거 운동 기간에 열린 민주당 스티븐 더글러스 후보와의 토론에서 이 발언을 해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링컨과 더글러스의 토론은 미국 역사에서 ‘위대한 토론’이라고 기록되는 사건이다. 당시 미국 사회의 첨예한 사안이던 노예제를 둔 격론이었다. 당시 토론에서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로 찍혔고, 이 선거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이 토론은 링컨을 공화당의 유력 인사로 부상시켜 결국 대통령이 되는 날개를 달아준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링컨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반인종주의자였고, 더글러스는 노예제를 찬성하는 인종주의자였는가? 사안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링컨이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더글러스가 노예제 찬성을 주장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 토론의 핵심은 아니었다. 이 토론에서 핵심은 노예제 자체의 폐지라기 보다는 미국 영토가 확장되면서 새로 편입되는 주들에서 노예제를 도입할 것인지 여부였다.

링컨은 노예제를 확대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더글러스는 노예제 채택 여부는 그 주민의 주권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더글러스는 당시 기준으로 보면 노예제 자체를 옹호하던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다만 노예제 역시 주민들이 결정할 수 있다는 열렬한 주민 주권론자였다. 링컨이 출마한 1860년 대선에서 더글러스도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노예제 존치를 강경히 주장하던 남부 민주당원들은 더글러스에 반발해 독자 후보를 내세웠다. 이는 링컨의 당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링컨 역시 앞선 발언에서 보듯 인종에 내재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는 인종주의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노예제 자체의 폐지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사실 링컨은 당시 노예제를 즉각 철폐해야 한다는 북동부 공화당원들의 기준에 못미치는 정치인이었다. 애초 공화당 대선 후보로는 단계적인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헨리 클레이가 유력했는데, 북동부 공화당원의 반발로 좌절됐다. 링컨은 노예제 폐지에 관해서는 클레이에 비해 결코 급진적이지 않았지만, 공화당에게는 링컨의 정치적 텃밭인 일리노이가 중요했다. 링컨은 이렇게 어부지리로 공화당 후보가 되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링컨은 취임연설에서 자신이 결코 노예제를 폐지할 의사가 없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노예제가 있는 주들에서 노예제에 간섭할 목적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없다. 나는 그렇게 할 법적인 권한이 없다고 믿고, 그럴 의향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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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노예제는 문제 안돼”


링컨이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사실 노예해방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하나의 나라’로 지킨 공적 때문이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쯤 미국의 북부와 남부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의 차이로 하나의 나라로 공존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강력한 연방정부의 지원과 보호, 그리고 풍부하고 자유로운 노동력이 필요했다. 남부는 여전히 대농장이 주도하는 플랜테이션 농업 위주라서, 연방정부의 간섭 보다는 각 현지 실정에 맞는 자치권력과 노예제로 대표되는 구속된 노동력이 필요했다. 노예제가 이 남북 갈등의 상징이 된 것이다.

남부 주들은 대선에서 패배하자, 즉각 연방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 북부에서도 남부와 떨어져 사는 것이 좋다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연방에서 이탈한 남부주들은 설마 링컨이 군대까지 동원해 저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링컨은 연방을 지키는데 단호했고,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발발하자, 링컨은 연방 존속을 위한 전쟁에 승리하려면 노예해방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를 단행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 나의 최고 목적은 연방을 구하는 것이고, 노예제를 지키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어떠한 노예도 해방하지 않고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노예를 해방해서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 내가 노예제, 유색인종에 대해 하는 것은 그것이 연방을 구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한 편지에서 밝힌 링컨의 이 말은 노예제와 연방 존속에 관한 그의 유명한 견해다.

남북전쟁에서는 군인들만 약 75만명이 사망했다. 당시 미국 인구가 약 3천만명이었다. 100명 중 2.5명이 사망한 셈이다. 군인들이 청장년임을 감안하면 미국의 청장년 중 10% 정도가 죽은 참사였다. 그만큼 미국 사회에 깊은 내상을 남겼고,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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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지형은 노예제와 남북전쟁 영향


남북전쟁으로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됐지만,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북전쟁으로 인한 인종정치와 지역정치가 더 기승을 부리게 됐다. 특히, 남부가 그 중심이 되어, 미국의 정치지형을 결정하는 곳이 되어왔다. 전쟁에서 승리한 공화당은 남부 주까지 독식하며 몇십년 동안 권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공화당의 색채가 희미해지고, 북동부 독점자본과 부호, 대기업의 보호자로 변해갔다. 그 과정에서 남부는 다시 민주당 쪽으로 기울었다.

공화당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와 독점자본을 규제하고, 부패를 척결하는 개혁을 펼치기도 했다. 민주당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집권을 계기로 보수적 색채에서 벗어나는 시동을 걸었다. 결국 대공황의 와중에서 집권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남부-대도시 중하류층-소수민족-노조-진보세력들이 연합하는 무지개 동맹을 꾸려 민주당의 60년 집권의 기초를 놓았다. 특히, 남부는 보수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북부와 공화당에 대한 반감으로 민주당의 텃밭이 됐다. 남부는 민주당 정권의 토대였다.

하지만 1960년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민권운동이 터져나오고, 민주당 정부가 이에 호응하면서 남부의 정치 성향은 바뀌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남부는 보수적인 공화당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고, 그 선회는 1990년대 초에 완성됐다.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 집권 하에 치러진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으로 오르는 ‘공화당 혁명’이 일어났다. 이미 공화당은 1960년대 후반부터 대선에서 우세를 보였는데, 이 선거를 통해서 의회까지도 장악했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의장이 되는 뉴트 깅그리치 주도로 보수적 의제를 내세운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공약을 내걸고는 남부를 거의 싹쓸이 했다.

이로써 공화당 우위의 정치지형이 완성됐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정부까지 오는 보수화, 심지어 인종주의의 부활의 시작이었다.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층이 과거라면 미국 사회에서 숨도 쉬기 힘들었던 백인 우월주의 세력임을 감안하면 자명해진다.

트럼프의 대선 운동 과정에서 ‘대안우익’이라고 새롭게 포장된 백인민족주의 세력들이 인터넷 상에서 각종 대안매체를 통해 극성을 부렸다. 증오와 혐오를 부추키는 가짜뉴스가 본격적으로 사회적 문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트럼프의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 및 그 참모들이 소아성애자이고 아동매춘 조직을 운영하고, 한 피자집에 그 조직이 있다는 황당한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이를 진짜로 믿은 한 사람이 그 피자집에 총기를 들고 가 실탄을 발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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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미국자연사박물관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기마상.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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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이후 인종주의 부활이 부른 반인종주의 물결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있는 법이다. 백인우월주의라는 인종주의 세력이 다시 숨을 쉬는 현상은 반작용을 불렀다. 그 반작용이 최근 벌어지는 미국 위인들에 대한 인종주의 평가 및 각종 기념물에서 인종주의 혐의를 받는 인물을 퇴출하는 운동이다. 미국에서 남부연합의 상징물 퇴출은 과거에도 없지 않았으나, 본격화된 것은 트럼프가 집권한 이후 터진 버지니아 샬러츠빌 폭동 사태 때문이다.

민주당 성향이 강한 버지니아 샬러츠빌 시에서 지난 2017년 5월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의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하면서, 폭동으로 비화됐다. 리 장군 동상 철거 결정이 나자, 과거 흑인들을 린치하던 ‘쿠클럭스클랜’(KKK) 등 백인우월주의 단체와 세력, 대안우익 세력들이 샬러츠빌에 모여 시위를 벌이다가 결국 8월12일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충돌해 폭동으로 비화됐다. 당시 백인우월주의 세력들은 “유대인들은 우리를 대체하지 못할 것” “피와 땅” 들의 구호를 외치고, 심지어 나치 깃발까지 들고 나왔다. 충돌 과정에서 한 시민이 백인우월주의 분자가 돌진시킨 차량에 치어 숨졌다.

트럼프는 이 사태에 대해 양쪽 모두에게 책임이 있고, 양쪽 모두에 괜찮은 사람들도 있다고 발언해 기름을 부었다. 샬러츠빌 시위 사태는 미국 내의 인종주의 기승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다. 특히, 지난 2013년 이후 시작된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 운동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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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3일(현지시각) 워싱턴 링컨기념관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의 동상 앞에서 회견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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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은 미국 내 인종주의에 항의하는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 운동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영국 등 유럽에서도 노예무역 등에 관여된 식민주의자들의 동상이 철거됐다.

미국에서는 남부연합 수도였던 리치몬드에 있던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 동상이 철거되고,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동상도 보스턴·마이애미·버지니아에서 철거되거나 훼손됐다. 랠프 노섬 버지니아 주지사는 샬러츠빌 사태의 도화선이 됐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을 리치몬드에서 철거할 것이라고 발표해, 다시 ‘과거사 청산’ 논란의 불을 지폈다.

미 국방부가 남부연합 장군의 이름이 들어간 군기지의 개명 작업에 착수하겠다고 발표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즉각 거부했다. 그는 남부연합의 장군들도 미국 유산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남부연합 관련자뿐 아니라 그 이후 미국을 대표하던 위인들까지 논란의 대상으로 비화됐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동상도 그 대상이 됐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러시모어산 조각상의 대상이 된 4명(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중 한 명일 정도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하나다. 하지만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은 이 박물관의 현관 앞에 세워진 루스벨트의 동상을 철거할 것이라고 지난 22일 발표했다. 이 동상은 루스벨트가 말 위에 앉아있고,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이 그를 둘러싸고 시종하는 모양이다. 놀라운 것은 그의 증손자가 이에 동의한 것이다. 증손자인 루스벨트 4세는 “그 기마상의 구성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유산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동상을 옮겨 전향적으로 조처할 때”라고 동의했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개혁을 추진한 공적을 평가받고 있으나, 해외에서 미 제국주의 팽창을 선도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특히, 인종 문제에서 복잡한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01년 흑인을 처음으로 백악관으로 초청해 저녁을 함께해 남부 주들의 격노를 자아낸 인물이다. 초청된 흑인은 노예 출신으로 대선 보좌관을 지낸 부커 워싱턴이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흑인 모두는 백인에 비해 열등하고”, 흑인들은 “백인에 비해 200년이나 뒤졌다”고 말했다고 그의 전기를 쓴 에드먼드 모리스가 전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도 인종주의 논란을 피하지 못했다. 프린스턴대의 명문 국제관계 대학원 ‘우드로 윌슨 공공국제문제 스쿨’에서 윌슨의 이름을 지우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이 대학교 총장 시절 흑백분리를 찬성하고,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윌슨은 1차대전 때 미국을 참전시켜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고, 전후 처리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해 우리나라의 3·1운동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의 ‘존 웨인 공항’에서는 존 웨인의 이름을 지우는 작업이 추진돼, 격렬한 반대가 일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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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든 존슨 전 대통령이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1966년 3월 백악관 상황실에서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 목사를 만나고 있다. 존슨은 인종주의 언행을 서슴지 않았으나, 정치적 손실을 감수하며 민권법 제정을 주도해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다. 존슨도서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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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언행’ 존슨, 대통령 사명 잊지 않고 민권법 제정


루스벨트와 윌슨, 존 웨인도 인종주의 비판 앞에서 살아남지 못하는데 미국의 어떤 역사적 인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비판과 반론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미국의 인종 문제에서 링컨에 이어 가장 큰 공헌을 한 1960년대 린든 존슨 대통령도 도마에 오를 수 있다. 그는 1964년 민권법 제정을 주도해, 미국에서 인종평등을 향한 가장 큰 디딤돌을 놓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 민권법 제정의 대가로 남부 주들이 민주당에서 이탈하는 정치적 손실을 감수했다.

하지만 존슨은 인종주의적 발언을 서슴지않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도한 민권법을 ‘검둥이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전기를 쓴 로버트 캐로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흑인 운전사에게 “검둥이라고 불리기를 반대하냐”고 물은 뒤 “네가 흑인인 이상 죽을 때까지 흑인이고, 아무도 너를 그 빌어먹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존슨은 “그래서, 네가 뭐라고 불리던 간에, 검둥이 너는 물처럼 무시하고 넘어가라. 마치 가구의 일부인 것처럼 행세하라”고 말했다.

텍사스 출신인 존슨은 전형적인 남부 보수 인사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편견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미국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통령의 사명을 추진하는데 자신의 취향과 편견에 좌우되지 않는 능력을 보여줬다. 그 결과 자신의 정치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민권법을 추진하고, 흑백분리를 여전히 고집하던 남부의 학교들에 흑인학생들이 등교할 수 있도록 연방군까지 파견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그건 링컨도 마찬가지였다. 흑인은 본질적으로 백인과 다르다고 인식했지만, 당시 미국이라는 땅에서 이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대통령으로서의 생각은 확고했다.

트럼프 이후 부활한 미국 내 인종주의는 오히려 거대한 반인종주의라는 반작용을 불렀다. 급기야, 미국이 애써 무시하려던 치부들도 들춰내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위인들도 인종주의 혐의를 받는 것은 거대한 역사적 물결이 몰아칠 때 휩쓸리는 현상일 수 있다.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미시시피 주가 30일 주 깃발에서 남부연합의 문양을 지우는 결정을 확정했다. 미시시피는 미국에서 남부연합 문양을 깃발에 쓰는 마지막 주였다. 테이트 리브스 미시시피 주지사는 남부연합기 문양을 지우는 법안에 서명하며 “기념물은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고 깃발은 현재와 미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부연합도 미국 역사의 일부임이 분명하나, 미국의 현재와 미래를 상징할 수는 없다. 그건 루스벨트, 윌슨, 존슨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과오가 들춰진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적 공헌도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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