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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최병준의 가타부타]IMF 키즈가 맞닥뜨린 코로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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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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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흔든 경제위기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를 변화시킨다. 때로는 충격의 기억과 상처만 남기지 않고 사회의 구조까지 흔들어놓는다. 조직과 문화는 물론 가치 척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때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청년과 아이들일 것이다. 안정이 보장되는 직장이라도 얻어 뿌리를 내린 사람들과 달리 미래를 어깨에 짊어진 채 인생의 나침반을 들고 길 위에 서 있는 청년들에게 변화의 충격은 더 크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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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현재의 경제시스템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만들어졌다.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노동자를 희생시켰다. 기업은 일정 기간만 임시로 고용하고(계약직), 직접 고용하는 대신에 다른 회사를 통해 일을 맡기고(파견직), 기업과 개인사업자 간의 거래 형식으로 고용한다(특수고용직).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디지털 플랫폼을 바탕으로 일손이 필요한 사업주와 노동자를 연계해주는 플랫폼노동이 확산됐다. 하지만 노동자에게 일을 배당할 때 횟수, 거리, 시간, 비교, 평가 등을 통해 노동자를 사실상 통제한다.

코로나19 사태에 의한 경제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려울 거라고 한다. 외환위기 당시는 아시아 일부 국가의 상황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세계 경제에 대침체를 불러왔지만 중국이 엄청난 경기부양을 하면서 세계 경제의 동반몰락은 피할 수 있었다. 코로나19 위기 와중에 세계 경제의 두 축인 미국과 중국이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어 앞날을 점치기조차 힘들다.

고용은 줄고 있다. 정기공채를 없애고 수시채용으로 바꾼 대기업도 있다. 비교적 쉽게 취업을 했던 이른바 ‘SKY’ 대학의 이공계 출신들도 서류면접에서조차 떨어지고 있어 해당 학교의 취업준비생들이 위기감에 빠졌다는 소리도 들린다. 29세 이하 청년 구직급여 신청은 지난 5월 기준으로 지난해에 비해 40% 정도 높아졌다. 청년실업률은 10.3%로 전체 실업률(4.5%)의 두 배를 넘는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협력업체 보안요원 1900명 직접고용 전환에 대한 취업준비생들의 비판은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현재 취업준비생들은 ‘IMF 키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무한경쟁’이란 시스템에 던져졌다. 로또 수준은 아니더라도 번듯한 직장은 ‘100 대 1’을 훌쩍 넘기는 ‘좁은 문’을 앞두고 피튀기는 경쟁을 해왔다. 1인당 국민소득은 3만달러가 넘었다고 하지만 소득 분배는 극도로 불평등하다. 지난해 8월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의 55%에 그쳤다. 청년들 입장에선 금쪽같은 몇 년을 희생해서라도 정규직 관문을 통과하는 게 낫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단순한 고용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이며, 신분이라 할 만하다. 이철승은 1997년 외환위기 경제체체를 이렇게까지 표현했다. “연공제를 통한 안정적인 고용과 자동적인 임금 상승, 기업 복지 혜택을 받는 핵심노동자층과,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주변부 노동자층으로 노동시장 지위를 이분화한 것이다. 이로써 절반의 정규직은 내부자로 초대되면서 지배의 동반자로 포섭되었고, 나머지 절반의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새로운 ‘두 국민 전략’이 노동시장의 ‘새로운 제도’로 자리매김한다.”(<불평등의 세대>)

나는 청년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반대한다고 보지 않는다. 이들도 김용균 세대이고, 구의역 김군 세대이다. 좋은 일자리가 적기 때문에 대다수는 비정규직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시험’이라는 하나의 사다리가 아니라, 불평등 해소를 위한 사다리는 계속 놓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 큰 이유는 분배 불평등과 소극적 재분배 사회구조가 변할 것 없다는 절망감이 이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진보 정부도 초기에는 공정경제를 외치지만 경제가 악화되면 대기업 투자와 규제 완화로 방향을 선회했다. 현 정부도 2018년 정책방향에선 일자리(일자리의 질)와 공정경제, 혁신성장을 3대 전략으로 내세웠으나, 지난해에는 4가지 주요방향 중 3가지가 투자로 채워졌다. 토건으로 경기부양을 하지 않겠다던 방침도 건설투자를 늘리는 쪽으로 옮겼고 예비타당성조사 면제까지 확대했다.

분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재분배(세금 등)를 통해 불평등을 재조정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해야 하는데, 정부는 과감한 증세에 소극적이다. 토마 피케티가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미국과 영국에서 고소득자에 대한 한계세율이 80~90%달했던시대에 가장 불평등이 적었으며 높은 성장을 했다고 밝혔다. 피케티가 제시한 불평등 해법 중 하나는 강력한 증세와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다.

한국의 경제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다.코로나19 위기라고 20층으로 설계한 아파트를 10층까지만 올리고 공사를 중단할 수 없듯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공장이나 설비투자는 코로나19 와중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하반기에는 투자가 더 감소할 게 뻔하다. 긴급재난지원금 효과가 떨어지면 소비도 다시 줄어들고, 25%나 되는 자영업자들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10년, 20년 전이면 콧방귀도 안 뀌었을 기본소득을 정치권, 특히 기업인들까지 주장하고 있는 데는 일자리가 결코 쉽게 늘어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 분명 작용한다. 한국 노동자만 불평등한 게 아니라 세계적으로 다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IMF 자료를 보면 노동생산성과 실질임금의 차이는 한국이 가장 급격하게 벌어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한다. 경제체제는 ‘변화’나 ‘개혁’을 요구하는 수준이 아니다. 판 자체를 바꾸는 전환이어야 한다.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b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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