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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가족주의 모순 폭로하는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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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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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가족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는 진숙(원미경)의 ‘졸혼’ 선언을 통해 가족주의의 억압과 모순을 폭로한다. 가족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모른 척’하고 외면했던 문제들을 건드린다. 드라마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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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MBC 가족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가부장적인 남편의 억압 속에 살아가던 여순자(김혜자)는 김국환의 노래 ‘타타타’를 따라부르며 겨우 시름을 달랬더란다. 이 작품을 쓴 김수현 작가는 2008년 작인 KBS <엄마가 뿔났다>에서 이 ‘인고의 국민 어머니’가 가족 안에서의 의무를 참다못해 ‘주부 안식년’을 선언하는 모습을 그린다. 주인공 김한자(김혜자)의 남편 일석(백일섭)은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이순재)와 달리 ‘가정적’이고 ‘좋은’ 남자였지만, 자아 찾기를 향한 한자의 열망은 그 말의 한계를 간파할 정도로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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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TV평론가


그로부터 13년 뒤, tvN 가족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는 또 하나의 어머니 선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즘 말로 졸혼, 나 그거 하려고.” 결혼 이후 삶의 대부분을 주방 앞에 선 채로 살아왔던 60대 여성 이진숙(원미경)은 오랜만에 불러 모은 자식들 앞에서 결혼을 졸업하겠노라 말한다. 가족들의 반응은 제각각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일하다. 듣자마자 헛웃음부터 터트리는 막내아들, ‘엄마가 그런 일을 어떻게 하냐’는 큰딸. 무시당한 엄마는 평생의 한을 응축한 소리로 되묻는다. “엄마 결정이 우습냐? 내가 왜 못해. 네가 날 알아?”

<가족입니다>는 진숙의 선언을 계기로, 그동안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무겁게 가라앉아 ‘모르고’ 있던 온갖 갈등과 문제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과정을 그린다. 알고 보니 진숙뿐 아니라 모두가 ‘지긋지긋한 가족’에 대해 내심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일한 운수 노동자 남편 상식(정진영), 가족의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20대의 빛나는 청춘을 고스란히 잃었던 장녀 은주(추자현), 그리고 예민한 가족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각각 중재자와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해야만 했던 차녀 은희(한예리)와 막내 지우(신재하)까지, 누구 하나 생채기 나지 않은 이가 없다.

이들의 고통은 근본적으로 가족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이 구성원 개인의 정체성보다 우선시되는 한국 사회 특유의 강력한 가족주의에서 비롯된다. 더구나 이 가족주의를 더 강화하는 방식으로 부실한 사회안전망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모순적 시스템이 개개인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킨다. 결혼을 통한 가족제도 진입과 동시에 엄마, 아내,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강요받는 여성들은 이 시스템의 최대 피해자다. 가족제도의 피라미드 가장 밑바닥에서 모든 부담을 떠받치고 있던 엄마들이 ‘탈가족’을 선언하자 가족공동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가족입니다>는 그렇게, ‘엄마니까 혹은 장녀니까’라는 말로 구성원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족주의의 억압과 모순을 폭로하고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가족주의의 모순을 미스터리 장르로 풀어낸다는 데 있다. 가족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모른 척’하고 외면했던 문제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이 놀랍도록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출생의 비밀, 혼외자식, 기억상실 등 기존 가족드라마에서 진부한 클리셰로 사용되어왔던 요소들이 이 작품에서는 흥미로운 미스터리 장치가 된다. 사실 클리셰가 나쁜 것은 그것이 단순히 낡고 지루한 요소여서라기보다는 그 안에 마땅히 존재하는 인간의 고통과 사회의 모순까지 뻔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입니다>는 인물들이 어떻게 내면에 비밀을 숨기게 되었는지, 그 동기를 추적하고 분석하는 미스터리 플롯을 통해 결국엔 그 인간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만든다. 가령 엄마 이진숙은 왜 출생의 비밀을 지니게 되었는가. 기존의 막장드라마는 이를 불륜과 혼외자식 등의 자극적 전개로 풀어나가지만, <가족입니다>는 다르다. 진숙이 은주에게 오랫동안 숨겨온 진실을 고백하는 장면은 여성의 혼전 임신을 ‘집안의 수치’로 여기는 시대의 모순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동안 가족 유형 다변화 시대를 반영한 많은 홈드라마가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를 해체하는 것으로 차별점을 두려 했다면, <가족입니다>는 너무나 기본적이어서 오히려 놓치고 있던 가족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 의문으로 되돌아간다. 지금까지 ‘가족끼리의 일’이라는 말로 봉합되고, 그래서 사소한 문제로 간과되어왔던 폭력과 억압들은 본격적인 미스터리 플롯을 통해 진지한 탐구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적어도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가족 내 ‘엄마의 자리’가 더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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