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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숨]큰 바위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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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45년 동안 우리 교과서에 실렸던 이야기가 있다. 너새니얼 호손이 1850년에 발표한 ‘큰 바위 얼굴’이다. 주인공 어니스트는 언젠가 마을의 바위를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거라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설을 믿는다. 그를 기다리며 일생을 목수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던 노년의 어니스트가 어느새 큰 바위를 닮은 사람이 된다는 얘기다. 이 소설을 배우던 날, 자습서에서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의 러시모어산에 있는 조각상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바위산에 미국의 대통령 워싱턴,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링컨의 얼굴을 새긴 이 거대한 조형물은 1930년대에 만들어졌기에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과 직접 관련은 없다. 그런데 두 이미지는 오랫동안 겹친 채로 남았다. 미술실의 조각품처럼 하얀 얼굴을 가진 이국땅의 남성 대통령들이 ‘위대함’의 개념을 독차지한 것이다. 당시 군부독재로 대통령이 된 사람의 사진이 칠판 위에 걸려 있었는데 그 단원을 배우는 어린 우리들에게 위대한 자에 대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자습서의 숨은 의도였는지는 모르겠다.

경향신문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검은 언덕(Black Hills)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화강암 산이 아메리카 원주민 라코타족이 수천년간 성스럽게 여겨온 땅이었고 이곳에서 대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역사 속에서 약자들은 강자에게 위대함을 빼앗기고 부당한 존경을 강요당했으며 모욕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다. 원주민 생존자들이 대통령 조각상의 존재를 비판하며 제거를 요구해왔으나 위대함의 상징인 러시모어산에서는 오히려 불꽃축제가 열렸다. 그런데 올해 미국 독립기념일(7월4일)을 앞두고 이곳의 폐쇄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는 뉴욕타임스 기사를 읽었다. 조각되어 있는 워싱턴과 제퍼슨 대통령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골적인 인종차별 발언을 했다는 것이 새로운 쟁점이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위대함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 것이다. 라코타족의 후예들은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바위산의 거대 조각상들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했는데,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이해하는 이들이 이제야 늘어나고 있다.

차별과 혐오가 해로운 것은 우리 자신을 똑바로 사랑하고 존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폭력적 행동만 문제가 아니다. 말과 눈길과 손짓이 모두 해롭다. 존경과 멸시는 서로 등을 대고 있어 거짓으로 누군가가 나보다 더 위대하다고 착각하게 하는 구조를 만들고 그 틈새로 혐오가 기어든다. 온전한 우리를 낮추게 된다. 더 낮추어 봐도 될 것 같은 사람을 기어코 찾아내 괴롭히도록 부추긴다. 타인의 삶은 물론 내 삶도 파괴해버린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위대하다는 큰 바위 얼굴 중 작은 나라, 유색인종, 여성은 없을 거라는 막연한 자기 비하의 감정을 가졌던 것 같다. 이런 위축된 마음은 강대국 비유색인종 남성의 바위산 조각상을 필요 이상으로 높이 우러러보게 만든다. 혐오는 나도 모르게 나를 겨눈다. 그리고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은 약자인 나를 보호하고 존중하도록 돕는 법안의 다른 이름이다.

서울시 국어바르게쓰기위원회가 행정용어를 순화하기 위해 ‘드라이브 스루 검진’ ‘워크 스루 검진’을 ‘차 타고 검진’과 ‘걸어서 검진’으로 바꾸자는 권고안을 선정했다. 더 근사해 보이는 ‘1세계 언어’의 유령을 걷어낸 것이다. 그 덕분에 뭘 어떻게 검사받는다는 건지 모르던 노약자도 뜻을 분명히 알고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말이 차별을 받는다니 말이 되느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렇게 우리 안엔 여전히 헛기침하며 멋진 척하는 큰 바위 얼굴들이 있다. 좋은 말은 생명을 구한다. 차별 없는 공동체가 나를 지킨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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