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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국회의원 나리들, 일 좀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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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한겨레

조선 숙종대의 화원 진재해(秦再奚, 1691-1769)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청록산수화풍으로 그려진 경직도. 경직도는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소재로 한 그림을 말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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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숙종 4년) 사헌부에서 백성이 각종 세금으로 바치는 포목(布木)을 원래 법대로 약간 거칠고 짧은 것으로 내게 하자고 숙종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비변사의 반대로 없는 일이 되었다. 사헌부는 과거 경작했으나 지금 경작하지 않는, 아니 경작할 수 없는 땅에 세금을 물리지 말 것을 요청했다. 비변사는 그렇게 할 수 없노라고 반대했다. 사헌부는 또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이 군역을 피하는 자들을 숨겨주어 군포를 낼 백성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죽은 사람과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폐단이 생긴다면서, 감영과 병영이 숨긴 자를 조사하자고 요청했다. 비변사에서는 역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막았다.

비변사는 조선의 최고 정책결정 기구였다. 조정의 일부 관료 혹은 벼슬하지 않은 사족들이 폐정(弊政)을 고치기 위해 왕에게 상소하면, 왕은 그 상소문를 비변사에 회부하여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비변사가 개혁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뿐만 아니었다. 백성들도 농사를 폐하고 양식을 싸가지고 서울의 각 관서를 찾아다니며 상언(上言)을 했지만, 말이 잡스럽고 격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시하기 일쑤였다.

대사간 이원정은 1677년(숙종 3) 5월19일 상소에서 “정령(政令)은 비변사에서 나오는 것인데,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사무나 폐막(弊瘼)을 왕이 읽고 비변사에 회부한 지 여러 해인데도 검토한 뒤 보고하는 일이 없고, 고위관료들이 회의 끝에 올린 안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답이 없다”고 지적했다. 비변사는 실제 이 핑계, 저 핑계로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변사만 그랬던가? 직무 유기는 거의 모든 관청의 관행이었다. 1702년(숙종 28) 4월4일 숙종은 고령의 유학(幼學) 정재송(鄭載松)이 올린 상소를 거론했다. 정재송은 3년 전 고령의 남자 인구가 1457명인데, 군포를 낼 사람으로 정해진 사람이 1866명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해결 방안을 올렸다. 드물게도 비변사에서는 나름 해결책을 마련해 경상도 감영에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공문이 오건 말건 경상도 관찰사와 고령현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재송이 다시 상소를 하지 않았다면, 이들의 직무 유기는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국가 기관의 직무 유기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당연히 백성이었다. 1676년(숙종 2) 12월23일 영의정과 좌의정은 숙종에게 경기도에서 환곡의 독촉을 견디다 못해 목을 매어 죽은 사람이 있었노라고 보고했다. 이날 <실록> 기사에서 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경기도 고을 백성이 독촉을 견디다 못해 목을 맨 경우까지 있었지만, 비변사에서는 듣고 놀라는 일도 없었고 해당 고을의 수령을 문책하는 일도 없었다. 해가 바뀐 뒤에는 환곡 독촉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거야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니, 그런다고 백성들의 원망이 풀리랴? 또 누가 그 말에 속겠는가?”

나랏일이 산더미 같다. 국회의원 나리들 일 좀 하시라. 백성이 목을 매고 죽건 말건 그냥 뭉개고 지나갈 수 있던 조선시대가 아니다. 일 하기 싫으면 그만두시든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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