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민주주의를 오염시키는 사회의 적 ‘지적 오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철학자 마이클 린치 ‘지적 오만함’이 낳은 문제 해부

지은이 “‘지적 겸손함’ 덕목을 회복해야 한다” 강조


한겨레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마이클 린치 지음, 성원 옮김/메디치·1만5000원

최근 <뉴욕타임스>는 ‘피자게이트’가 4년 만에 다시 온라인에서 유행한다고 보도했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힐러리 민주당 후보와 선거대책위원장이 아동 성학대와 성매매를 하고 있다는 가짜뉴스였는데 성학대가 벌어지는 장소를 워싱턴 디시(DC) 한 피자가게 지하실로 지목해 ‘피자게이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뉴스지만 당시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유포됐다. 에드거 웰치라는 남자는 ‘자체 수사’를 하겠다고 총을 들고 피자가게에 난입했다. 당연히 성학대는커녕 지하실조차 없었다. 흥미로운 건 그 다음이다. 웰치가 100% 가짜 정보였다고 밝히자 뉴스를 퍼나르던 사람들은 웰치가 민주당에서 보낸 배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이들은 뉴스의 진실 여부는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피자게이트는 저자가 주장하는 “실천에 대한 나쁜 신념이자 지적 오만함”의 전형적 사례다.

한겨레

최근 미국에서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힐러리 민주당 후보와 선거대책위원장이 한 피자 가게 지하실에서 아동 성매매를 한다는 내용의 가짜뉴스가 다시 퍼지고 있다. 이 가짜뉴스를 일컬어 ‘피자게이트’라고 부른다. 사진은 2016년 7월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EPA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비단 가짜뉴스뿐 아니라 소셜미디어에서 주로 드러나는 양극단의 견해를 한 문장으로 아우를 수 있다.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이 책의 제목이다. 원제는 자신이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는 ‘노잇올(Know-it-all) 사회’다. 둘 다 내 생각과 다른 남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실은 내 생각과 같은 사람들 이야기도 듣지 않는다. 책에서 인용한 2016년 컬럼비아대의 데이터 연구팀 조사에 따르면 뉴스를 공유한 사람 가운데 실제 그 기사를 읽는 사람은 열명 중 네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온라인에 내용을 공유하는 행위의 주요기능은 실제 정보가 아닌 “감정적 태도”를 전달하는 것으로 소셜미디어는 정보의 플랫폼이 아니라 사실상 “분노 공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의 부제는 ‘똑똑한 사람들은 왜 민주주의에 해로운가’다. 책에서 ‘똑똑한 사람들’은 지적 오만함과 파벌적 오만함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지적 오만함은 지적 우월성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증거와 경험을 통해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고집하는 태도”다. 이 태도가 “‘우리’의 일부로서 경험되고 ‘그들’을 겨냥할 때 파벌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저자는 미 대선 때 우파를 무식한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로 낙인찍고 서슴없이 경멸한 좌파 민주당 지지자들의 오만함이 결국 패배를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정치적 갈등의 핵심에도 파벌주의로 무장한 지적 오만함이 놓여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철학자인 저자는 우리가 가진 확신과 오만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의 앎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는 소크라테스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경험과 새로운 증거를 통해 향상될 여지가 있다고 보는” ‘지적 겸손함’의 덕목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지적 오만함에 빠진 사람들 대부분이 스스로 지적으로 겸손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저자의 제안은 선뜻 수긍이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만 ‘성찰적 실천’의 사회 체계화는 귀 기울일 만하다. 이를테면 수술 전 의료진이 하는 체크리스트는 도입 전 의사들로부터 쓸데없는 짓이라는 엄청난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일련의 연구들은 체크리스트를 통해 많은 목숨이 구해졌음을 보여준다. 단순하지만 중요한 원칙들을 재점검하면서 지적 오만함에 대한 환기까지 이뤄질 수 있다는 뜻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뉴스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